자유게시판
작성자 정하완
작성일 2013-09-04 (수) 23:59
첨부#1 p11909061.jpg (715KB) (Down:319)
ㆍ추천: 0  ㆍ조회: 2268      
IP: 58.xxx.152
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1

병자호란(丙子胡亂) 난중일기(亂中日記)

鄭之虎의 일기

병자호란(丙子胡亂) 370여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남한산성 45일간의 생생한 항전 기록

병자호란(丙子胡亂) 과 삼전도(三田渡) 요약

1636년 인조(仁祖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鷗)로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1632년 그러나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 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 1만량. 전마(戰馬) 3,000필과 정병(精兵) 3만 명을 요구하였다.

1636년 2월 또한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등을 보내어, 재차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와 대신, 척화론자(斥和論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 (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 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 하였다.

동년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 몽골, 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심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서, 처 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의주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도와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 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 비, 원손,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등을 강화도로 피난하게 하였다.

12월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 하였고 1637년 1월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대를 집결시켜, 산성은 완전히 고립 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 할 수 없었음으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 하였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 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사이에 논쟁이 거듭 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삼 전 도(三田渡)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박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명하였다.

(1) 청나라에게 군신의 (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2)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冊印)을 내놓을 것.

(3) 조선 왕의 장자, 제 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4) 성절(聖節; 중국 황제의 생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 (千秋; 중국 황후, 황태자의 생일), 경조(慶弔)등의 사절(史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5)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6)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7) 내외 제신(諸臣)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8) 성 (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 하지 말 것.

(9) 기묘년(己卯年; 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荇)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송파구소재)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3번 절하고, 머리를 9번 땅에 닿는 것)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 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불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두산세계대백과>


남 한 산 성 (南漢山城)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中部面) 산성리(山城里)남한산에 있는 조선 시대의 산성.

지정번호: 사적 제57호

지정연도: 1963년 1월21일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

시대 : 조선

면적 : 528,459m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12년(AD672)에 쌓은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의 옛터를 활용하여, 조선조 1621년(광해군 13년)에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 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과 이괄의 난을 치르고, 1624년(인조2)에 축성(築城)을 하였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의 구성은 본성과 외성, 옹성으로 되었으며, 둘레는 11,76km 이고, 성곽의 높이는 3m-7.5m 이고, 4 장대(서장대만 보존), 4 문, 5 옹성, 16 암문, 2 봉화대가 있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망월사 등 7개의 절(사찰)까지 세웠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수어사(守禦史) 이시백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 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14)년에 1만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45일 만에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를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였다. 남한산성은 백재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의 성터였다고, 도 한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난중일기(亂中日記)

병자년 12월 13일 계미(系未).

도원수 김자점이 장계(狀啓; 감사나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임금에게 글로 보고함)를 올려 적병이 벌써 안주(安州)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임금이 삼정승과 비국당상(備局堂上; 전란 때 군무를 총괄하는 최고기관의 장관)을 불러 놓고 이르기를 『적병이 벌써 깊숙하게 침입하였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하였다. 이에 대신과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이 세자의 분조(分朝; 세자가 딴 곳에서 임시 조정 을 설치하는 것)를 건의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4일 갑신(甲申)

개성유수(開城留守)가 장계를 올려 적병이 벌써 송도(松都; 개성의 옛 이름)를 경유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피란 할 것을 결정하고, 임금이 예방승지(禮房承旨) 한 홍일에게 명령하여 종묘의 신주와 빈궁을

모시고, 먼저 강도(江都; 강화도)로 가도록 하고, 김경징을 검찰사(檢察使)로 삼고 이민구로 부관을 삼아, 빈궁의 행차를 호위 하게 하였다, 심기원을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사람을 다시 불러내어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시켜, 유도대장(留都大將;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수도를 지키는 대장)으로 임명하고 해질 무렵 대가 (大駕: 임금이 행차 시 타는 수레 )가 출발하려고 할 때에 태복시(太僕시; 왕실의 말과 가마등을 관리하는 관청)의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내승(內乘; 궁내 가마와 말을 관장하는 관리) 이성남이 어마를 몰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에 이르니 적병이 벌써 양철평 (良鐵坪)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임금이 남대문에 올라가 신경진을 시켜 문밖에 진을 치게 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청하기를 자신이 적진에 달려가 적의동정을 살펴보고 오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최명길을 적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면서 적의 진격을 늦추게 하고

그러는 사이 임금은 수구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급작스런 사이에 일어난 변란이라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상당수 도보로 따랐으며 나는 반촌(伴村; 성균관이 있는 마을)에서 달려와 모시게 되었다. 대가가 초경(初更; 밤7-9시 사이)을 지나서 남한산성에 도착하니, 김 류가 임금에게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권하였다. 홍서봉, 이성구는 찬성하고 이 홍주는 현재 사태로 보아 반드시 낭패할 것이니 요행을 믿을 수 없다, 고 반대하였으며, 그밖에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병방승지(兵房承旨) 이경증이 집의(執義) 채유후에게 비밀로 말하여 강화도 피란이 불가하다는 것을 전달키로 작정하고 이경증이 김 류를 청하여 물으니 김 류가 말하기를『 외로운 성안에서 어가가 머물고 있으면 밖으로는 응원 병이 없으며, 안으로는 사람의 식량과 말 먹이가 떨어질 것이나 강화도는 우리에게는 편리하고 적에게는 침범하기가 어렵고 또 적의 본의가 명나라에 있는 만큼 반드시 우리와는 오래도록 대치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까닭에 신이 강화도로 가시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습니다,』『강화도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되는가?』하니 김 류가 말하기를『과천(果川), 긍천(矜川)을 경유 하여야 됩니다』하였다.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여기에서 강화도까지는 매우 먼 길인데 어찌 간단 말인가?』 하니 김 류가 말하되『빠른 말로 긍천과 과천의 들판을 경유하면 족히 도달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어가의 이동이 결정되어 하룻밤사이에 온 성안이 들끓었다.

12월 15일 을유(乙酉)

대가가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향할 새 눈과 바람이 사나워 길이 얼어붙어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이에 임금이 말을 버리고 도보로 나섰으나 도보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것을 짐작 하고 성안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계사를 올리고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 평안병사(平安兵使) 유림, 의주부윤(義州府尹)임경업 등 을 다함께 법에 따라 처벌토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최명길이 적진으로부터 돌아와 화친에 대한 일을 아뢰되 적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요구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논하기를 능봉수(綾峯守) 칭(稱)을 임금의 아우라 하고 판서 심 집을 대신이라 하여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오랑캐의 사자가 성 밑에 이르렀으며 최명길도 역시 적진에서 돌아왔다. 최명길이 말하기를『그들의 말과 표정을 살펴보니 세 가지 조건으로 강화하는 외에는 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틀림없이 속임을 당하였다. 어찌 그러한 세 가지의 일로 여기까지 그들이 왔겠는가?』하였다.

12월 16일 병술(丙戌)

능봉수 칭과 심 집이 적의진영 으로 가서 강화를 의논 할 새 적이 묻기를『너희 나라가 지나간 정묘 년에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이더니 이 사람은 진짜 임금의 아우가 맞는가?』하니 심 집이 역시 대답하지 못하였다. 적이 드디어 박난영 에게 물으니 박난영이 칭을 진짜 임금의 아우라 하고 심 집을 진짜 대신이라 하니 적이 박난영을 죽이고 말하기를『세자를 보낸 뒤에라야 화친을 의논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성을 순찰하고 사졸(병사)들을 격려하였다.

17일 정해(丁亥)

임금이 대신과 비국당상을 불러놓고 울면서 말하기를『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하여야 되겠는가? 내가 비록 덕은 없으나 본래의 뜻은 착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더니 오늘날 이 모양 이 되었다. 나 한 몸 죽는 것은 아깝지 아니 하나 부형과 백관과 성에 가득한 군사와 백성들이 나로 인하여 다 몰락할 것이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처럼 망극 한 일이 있겠는가?』하였다.

김 류등이 말하기를『 일이 급하옵니다. 훈구(勳舊; 대대로 공이 있는 집 신하) 10여인(餘人)을 데리고 미복 차림으로 동문을 경유하여 충청도로 가셨다가 경상도나 전라도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이 무슨 말인고 나를 따라 성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종실과 백관들이라 어찌 차마 사지에 버려두고 나 혼자만 빠져 나간단 말인가? 설사 다행으로 살게 되더라도 천지간에 낮을 어찌 들겠는가?』하였다.

김 류와 홍서봉이 말하기를『일이 매우 급박 하오니 강화를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만에 말하기를『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다른 일을 도모 하겠는가? 이것이 비록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아니나 사태가 매우 급박하니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하였다.

모두 말하기를『이러한 때에 어찌 명분을 따질 겨를을 차리겠습니까?

신 등이 가서 보았을 때에도 역시 재배(再拜)하는 예절로 행하여 중국을 대하는 예절로 대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홍서봉에게 이르기를『영상(領相; 영의정의 별칭)이 방금 군사를 주관하고 있으니 경이 이경직과 함께 나가보라.』고 하니 대답하되『만약 적이 친 왕자를 보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이르되『전일의 실수를 사과하고 또 대군이 현재 강화도에 있으니 추후에 보내겠다는 뜻을 말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세자를 원하더라도 어찌 마다 하겠는가?』하였다. 이때 세자가 곁에 있다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마침내 홍서봉, 김신국을 적의 진영으로 보냈다. 홍서봉이 적의 장수를 보고 재배 하였다. 김 류, 홍서봉, 김신국, 장유, 최명길, 이성구, 이경직, 홍방, 윤 휘 등이 청대(請對; 급한 일로 임금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것)하고 김 류가 말하되『적병이 또 증가하여, 그 수가 매우 많으니, 이 작은 외로운 성으로는 역부족이오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되『경들 역시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니 숨김 없이 다 말하라.』하였다. 김 류가 말하되『 신 등이 아뢰고자 하는 바가 있사오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겠습니다.』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임금이 이르되『세자를 인질로 삼고저하나 감히 말을 못한다는 것인가?』하니 김 류가 말하기를『인질을 교환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비록 세자로 하여금 오랑캐의 진영에 가게 하더라도 핍박하여 심양까지 들어가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되『옛날에 인질 교환이 있었으나 지금 이것은 인질이 아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경들의 뜻이 그러하니 내가 마땅히 보내겠다. 세 사람의 대신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양사(兩司)와 강원(講院; 세자시강원)의 여러 신하들이 나아가 말하기를,『비국당상의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빌미로 삼아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려고 하오니, 이것은 참으로 망국의 말입니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되『종묘사직과 온 백성을 위한 대책이다.』고 하니, 동양위 신익성이 또 청대하여 말하기를,『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러한 계책을 꾸몄습니까? 신이 마땅히 이 칼로 발론자의 머리를 벤 뒤에 세자의 말을 붙잡고 그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죽겠습니다.

엎드려 원 하옵건대 괴상한 일이라 여기지 말아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조정의 말이 아직은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다.

경이 반드시 잘못 들었을 것이다.』하였다.

12월 18일 무자(戊子)

임금이 행궁(行宮; 임금이 피란 또는 순찰 같은 일로 임시 머무는 궁궐) 남문에 올라 백성들을 위로하니, 전 참봉 심광수가 청하기를『한 사람을 베어버려 화친하자는 말을 끊어 버리고 분개하고 있는 백성의 마음을 달래주소서.』

하니 임금이 묻기를『그 한 사람은 누구를 말하는고?』하니 최명길이라고 외쳤다. 임금이 위로하며『너희 뜻은 내가 벌써 알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최명길이 반열(옆)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곧 나가버렸다.

19일 기축(己丑)

임금이 북문으로부터 북쪽 곡성(曲城)까지 순시하고 돌아왔다. 날 샐 무렵 적병이 남쪽성에 침공하여 온 것을 아군이 화포(火砲)로 격퇴 시켰다. 임금이 성을 순시하고 병사 들을 격려하였다.

20일 경인(庚寅)

적의 사신(使臣) 세 사람이 성 밖에 옴에 김 류가 최명길을 보내서 물어 보도록 지시하니, 임금이 최명길은 가면 속임을 당한다고 하면서 김신국과 이경직을 보냈다. 김 류가 비로소 군사를 선발하여 출격할 계획을 세웠다. 김신국, 이경직이 들어와 아뢰되『적의 사신의 말이, 지난번 대신들이 돌아간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한(汗; 청의임금 오랑캐의 추장)이 벌써 송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뒤로는 우리들이 양국 백성을 위하여 대책을 베풀 수가 없다.』하더라고 하였다. 임금이 적의 사신들을 물리치도록 명령하고, 다시 밀서를 도원수에게 보내 군사를 진격시켜 후원토록 하고 또한 각도 감사와 병사 및 경기도 내, 각 고을에 지시하여 군사를 뽑아 적병을 격퇴하도록 하였으며 또 김경징 등에게 3도의 수군을 모두 부르도록 명하였다.

21일 신묘(辛卯)

초관(哨官; 보초병을 거느리는 무관) 이신민이 유도대장 (留都大將; 궁궐에 남아있던 대장) 심계원의 장계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장계의 내용이, 전공(戰功)을 허위 과장하여 조정을 속인 것이 많아, 보는 사람이 다 경악분개 하였다. 충청도 응원군이 헌릉(獻陵)에 이르러 화전(火箭; 불을 붙인 화살)으로 서로 응전 하였다. 마부달(馬夫達)등이 또 성 밖에 이르니, 김 류가 다시 김신국 이경직 을 보내 온 이유를 물어 보도록 하였다. 이때 김 반, 조 익수 등이 보내지 말도록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김신국 등을 보냈다. 김신국과 이경직이 적진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마부달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들의 저의가 화친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22일 임진(壬辰)

임금이 김 류를 불러 이르되『오늘은 마땅히 한바탕 결전을 하여야 겠다, 고 하니, 김 류가 판단성 없이 미루어 나가자는 뜻으로,

대답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각 병영에 전령을 보내, 식사를 마친 뒤에, 출전 하도록 하라.』고 하니, 김 류가 말하기를 『신이 여러 대장들과 더불어 한 곳 으로 하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신경진, 구 굉, 등이 말하기를『요즈음 싸우는 상태를 보았더니 마치 사냥개가 짐승을 좇는 것과 같더라.』고 하였다. 삼사『三司;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가 일제히 모여 화친을 주창한 사람의 처단을 청하려고 하였으니 교리(校理) 윤집이 그 의논을 주장 하였 으며 대사간(大司諫) 김반과 집의(執義) 채유후가 지나친 일이라, 하고 힘써 저지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23일 계사(季巳)

모집한 군사들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으며 임금이 소여(小輿; 작은가마)를 타고 북성 으로부터 서쪽 성 정청(正廳; 군사령부를 말한 듯)에 납시어 군사들을 호궤(縞饋; 군사들을 잘 먹이는 것]하고, 승지에게 명령 하여 위로토록 하였다.

24일 갑오(甲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聖節; 명나라 천자의 생일)의 망궐례 (望闕禮: 외지의 관리가 명절과 임금, 왕비의 생일날 궁궐을 향하여 절하는 예절. 설날, 동지, 성절, 천추절에 중국의 궁전을 향하여 절하는 예절)를 거행하였다. 사백 명의 군사를 출전시킬 때 임금이 친히 참석하여 사기를 돋우었다. 이때 한 사람의 군졸이 대오를 벗어나 땅에 부복하고 말하기를『비단옷을 입은 사람으로 장수를 삼으면 자신은 성안에 않아 있으면서 유독 외로운 군사들만 나가서 싸우도록 할 것이오니 청 하옵건대 대오 열안에 있는 사람으로 장수를 정하여 주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되『너의 대장에게 말하라.』고 하였다. 이때 눈비가 끊임없이 내림에 임금이 세자와 승지와 사관을 거느리고 기청제(祈晴祭; 날씨가 맑아지도록 하늘에 비는 제사)를 지냈다.

25일 을미(乙未)

예조에서 계사를 올리고, 온조왕(溫祖王)에게 제사 지내도록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성안에 있는 파리한(마른)말을 잡아 장졸(병사)들을 먹였다.

26일 병신(丙申)

강원도 영장(營將) 권정길이 군사를 이끌고 검단산(儉丹山)에 이르러 봉화를 가지고 서로싸우다가 얼마 안 되어 적의 습격으로 패하고 말았다,

27일 정유(丁酉)

공청도(公淸道; 충청도의 옛 이름) 감사 정 세규가 군사를 이끌고 험천(險川)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으로 전군이 거의 죽고 세규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28일 무술(戊戌)

완천군(完川君) 최래길이 입대(入對; 임금 앞에 나아가 자문에 응대하는 것)하여 옛날 기신(유방이 항우에게 포위 되었을 때, 유방의 수레에 타고, 유방을 대신하여 죽고 유방을 구하였음)이 초나라 항우를 속이고 유방을 구제한 일을 감행 하려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 하지 않았다

29일 기해(己亥)

유도대장 심기원이 사람을 뽑아 납서(蠟書; 비밀의 보장과 습기의 방지를 위하여 밀로 봉하여 올리는 글)로 장계를 올려 이르기를 (서울에 머물고 있는 적병의 수는 대략 500-600명인데 비하여 우리 군사는 겨우 275명입니다. 다행히 화공(火攻)으로 이겼으며, 낙오된 포수들을 불러 모아, 이정길로 대장을 삼았습니다.) 고하였으니 허위 과장된 말이 많았으나 성안의 사기는 진작되었다.

이날 북문 밖에 출병하여 평탄한 곳에 진을 치니 적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저녁나절 체찰사(體察使; 나라 변란이 있을 때 재상(宰相)이 임금을 대신하여 군무를 겸임 하던 임시 직책) 김 류가 성위에 있으 면서, 철군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연락하니,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別將) 신성립 등 여덟 사람이 모두 죽고 많은 사졸(병)들이 죽었다. 이에 김 류가 싸움에서 패한 책임을 지고, 죄를 청하니 임금이 그들을 위로 하였다.

병자년 12월 30일 경자(庚子).

임금이 삼정승과 이조판서 최명길을 불러들여 묻기를『사신 보내는 일은 어떻게 처리 하였는가?』하였다. 김 류가 말하기를『군사의 지휘를 잘못하여 실패 하였으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되『보병과 기마병의 차이가 현격 하거늘 가볍게 평지로 내려갔으니 어찌 실패하지 않겠는가? 중국 에서는 평지에 내려가는 데에 계율이 있었으니 실패를 염려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때 홍서봉 이 말하기를『일승일패는 병가에서 항상 있는 일이옵니다. 어제 약간은 좌절 되었으나 오늘 사람을 보내 그 상황을 탐지하는 것이 무방하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되『누구를 보내면 되겠는가?』하니 김 류가 이르되『김신국, 이경직, 등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호조판서가 영민하니 보내면 좋겠다,』고 하니, 김 류가 또 말하기를 위산보(魏山寶)의 예에 따라 허 한을 함께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 하오며, 또한 성안의 명령이 성 밖으로 통하지 않고 있으니, 심기원을 제도원수(諸道元帥)로 임명하여 사방의 근왕병을 통솔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고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사간원에서 청대하여 적의 진중에 사람을 보내지 말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충청병사 이의배, 도원수 김자점을 군법에 처 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강화도의 서리(書吏; 문서를 맡은 아전) 한여종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와 전하되 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까지 해서산성(海西山城)에 있으면서, 적병이 계속 들어오는 것을 도원수가 황해감사와 더불어 군사를 파견, 요격 하여 동선(洞仙)에서 패하였으며, 경상병사 민영(閔영)어영군 8천명과 본도(本道)병마를 인솔하고 충주수교 (忠州水僑)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정축년 정월 초하루, 신축(辛丑)

임금이 뒤따르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망궐례를 거행하였다. 오랑캐 한(汗)이 여러 군사를 합하여 탄천(炭川)에 진을 치고 30만대군 이라 과장하며 황산(黃傘; 임금이 쓰는 황색 우산)을 벌려 치켜들고, 성의 동쪽 망월 봉에 올라가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비국낭청(備局郎廳; 비국에서 사무를 맡은 관리) 위 산보를 시켜 소와 술을 가지고 적의 진영에 들어가 신년 하례를 하는 한편, 그들의 형세를 살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청나라 장수가 말하기를『황제가 이미 와 있으니, 우리가 마음대로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공갈까지 하니 위산보가 소와 술을 도로 가지고 돌아와 버렸다, 임금이 삼정승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이르되 『적의 정세가 어떠한가?』하였다. 영의정 김 류 등이 말하기를『적의 정세가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오며 황제 운운 한 것은 과장인 듯합니다.』고 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저들이 비록 황제라고하나 스스로 체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들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만약 한이 전 병력을 총동원하여 온다면, 반드시 무의미 하게, 회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병력으로는 저항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화친 한다는 뜻을 가지고, 저들의 정세를 살펴보아야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신(史臣; 사초를 쓰는 신하)에게 글을 주어, 한(汗)에게 바로 보내며 이르되 『황제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본국 사정을 다 전달하겠다고 이르면 저들대로 무슨 반응이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면서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최명길의 말을 따라 김신국, 이경직을 시켜 적의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하였다. 마부달이 말하되『황제가 방금 성을 순시하고 있으니, 조용히 보고 하여 결정해서, 내일 일찍이 사람을 보내겠다.』하여 김신국 등이 돌아왔다. 이날 일식(日食)이 있었다.

정월 초 2일 임인[任寅]

임금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화친할 문서를 논의 하였다. 최명길이 말하기를『한이 멀리 폐방에 왕림 하였으니 국왕으로서 마땅히 사람을 시켜 문안 한다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회계(會稽; 월 왕 구천이 오 왕 구차에게 회계에서 패하고 성하에 내려가 강화를 맺은 치욕)의 치욕을 당하여 어찌 강굴(綱堀; 굴욕)하는 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며

홍서봉이 말하되『전일 뜬 말로 인하여 일을 그르칠 실수는 이미 다 말 하였습니다.

향화(香火)의 언약(言約; 형제의 언약을 맺는 것, 정묘 년의 호란에 형제의의를 맺고 강화하였음)이 지금까지 10년이 되었습

  0
3500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6 세계일보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37> 정씨의 유래와 기.. [1] 정하완 2013-07-02 4033
35 세계일보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38> 동래정씨 [1] 정하완 2013-07-02 3666
34 KBS 이달의 역사인물 <貞節公 鄭甲孫> 정하완 2013-07-04 3386
33 구리종중산에 시설물이... [1] 정하완 2013-09-07 3241
32 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 3 정하완 2013-09-13 2843
31 추사의 세한도에 위당 정인보선생의 발문 정하완 2013-07-11 2478
30 일반 군포시 속달동 정난종 묘소 치우정 2014-03-10 2363
29 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1 정하완 2013-09-04 2268
28 대전 뿌리공원에서열린 "제 5회 효 축제" 정하완 2013-10-13 1954
27 국립민속박물관에 호패 정하완 2013-10-10 1914
26 족보편찬 내역표 정하완 2013-08-31 1905
25 창원공파 사무실 위치 정하완 2013-07-05 1874
24 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2 정하완 2013-09-10 1815
23 수고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정하익 2014-04-03 1674
22 文科傍目 1 <해설 > 정하완 2013-07-12 1599
21 文科榜目 2 <東萊鄭門> 정하완 2013-07-14 1493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