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의 발생근원은 대략 중국 성씨제도(中國姓氏制度)에 영향을 받아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이라 전해 온다. 고대 씨족사회(古代氏族社會)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呼稱)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세력이 중앙 귀족화(中央貴族化)되면서 다수의부족(部族)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稱號)와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성(姓)은 왕실(王室)이나 귀족(貴族)에서만 국한되어 사용되다가 국가의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 혹은 지역과 강(江)이나 산(山)의 명칭에 따라 사성(賜姓)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대중들의 성씨(姓氏)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는 1047년 고려 문종(文宗)이후에서부터 보편화 대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모두가 성(姓)을 갖게 된 것은 조선조말기에 개혁정치가 시작 되면서부터 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기원전 57년 4월 병진일(혹은 1월 15일) 즉위하여 왕호(王號)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며, 그 때 나이는 13세이였다. 일찍이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이 곳에 와서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촌락(村落) 을 이루었으니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閼川楊山村)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突山高墟村)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嘴山珍支村-혹은 간진촌),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茂山大樹村),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金山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니 이 것이 진한(辰韓)의 육부(六部)이었다.(삼국사기에서)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6부(六部)의 명칭을 고치고 성(姓)을 내리니 양산부를 양부(楊山部-梁部)라 하여 그 성(姓)을 이(李)라 하였으며, 고허부를 사량부(高墟部-沙粱部)라 하고 그 성을 최(崔)라 하였으며, 대수부를 점량부(大樹部-漸粱部,혹은 모량부)라 하고 그 성을 손(孫)이라 하였으며, 간진부를 본피부(干珍部-本彼部)라 하고 그 성을 정(鄭)이라 하였으며, 가리부를 한지부(加利部-漢祗部)라 하고 그 성을 배(裵)라 하였으며, 고야부를 습비부(高耶部-習比部)라 하고 그 성을 설(薛)이라고 하니 이 것이 정씨 사성(鄭氏賜姓)의 유래(由來)이다.

 

 

 

동래는 우리 씨족(氏族)의 발상지(發祥地)로서, 신라(新羅) 탈해왕 23년(서기 79년)에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다. 살펴보건대 당시의 동래부 동쪽 10리(4㎞) 지경(地境)에 황령산(荒嶺山)산이 있으니 황령산과 거칠산의 뜻을 풀이하면 서로 같음을 알 수 있으니 이 곳이 동래군(郡)의 옛 터가 아닌가 한다.(삼국사기에서)

 

후세에 와서 지명(地名)은 오늘날의 동래로 고치었으며, 고려 때에는 울주에 속하였고 조선조 초기에 동래군(郡)이 다시 동래현(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이 다스렸으며 동래부(府)로 승격된 후에는 부사(府使)가 다스렸으니 군(郡)의 명칭을 장산(장山) 래산(萊山) 거칠산(居漆山)봉래(蓬萊) 봉산(蓬山)이라고 도 하였다.(東萊府誌에서)

 

살펴 보건대 신라 유리왕(서기32년)이 하사(下賜)한 6부의 성(六部之姓)의 관(貫)은 그 시초가 경주(慶州)인 까닭으로 아득하고 오래 된 호적(戶籍)이 모두 경주(慶州)였으나 그 후에는관(各貫)으로 분파(分派)하였는데 정씨관향(鄭氏貫鄕) 중에 현저(顯著)한 자(者) 십여인(十餘人)으로 영남(嶺南)이 가장 많으니 동래(東萊)가 그 중 으뜸이다.

 

고려 문종 5년(1051년 11월) 주, 현(州縣) 향리(鄕吏)의 승진 규정을 마련하였는데 주,현의 관리에게 처음 주는 직책은 후단사(後壇史)이고 두번째는 병사와 창사(兵史倉史)로, 세번째는 주,부,군,현사(州府郡縣史)이고 이어서 부병정, 부창정(副兵正副倉正) 부호정(副戶正), 창정, 병정(倉正兵正), 부호장(副戶長), 호장(戶長)까지 아홉단계로 되어있다. 그러한데 대대로 가풍(家風)이 훌륭한 자제(子弟)에게는 향직(鄕職)을 병사나 창사(兵史倉史)를 주고 그 보다 못한 자제에게는 후단사(後壇史)를 주었다. 또 이 밖에 공수,객사,약점,급사,옥사(公須,客史,藥店,及史,獄史) 등이 있고, 가풍(家風)이 이에 미치지 못하면 호정(戶正) 부병창정(副兵倉正)등의 관직(官職)을 주는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 동래정씨는 보첩(譜牒)의 계대(系代) 이전에 훌륭한 가문을 이어 온 지가 이미 오래고 그 훌륭한 가풍을 계승하여온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할 것이다.

 

또한 살피건데 정씨의 관향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씨족고(氏族考)에 보면 200이 넘는데 그 가운데 본관(本貫)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래 도표(圖表)와 같다.

 

 

 

관향(貫鄕)

시조(始祖)

관직(官職)

비  고

연일(延日)

의경(宜卿)

연일 호장

(延日戶長)

신라 간관 종은(新羅諫官 宗殷) 시조의 증조(曾祖)

경주(慶州)

진후(珍厚)

고려 평장사

(高麗平章事)

고려 시랑 손경(高麗恃郞 孫卿) 시조의 조(祖)

광주(光州)

신호(臣扈)

고려 전직

(高麗殿職)

고려 시랑 손경(高麗恃郞 孫卿) 시조의 조(祖)

하동(河東)

세유(世裕)

고려 병마사

(高麗兵馬使)

고려 시중 손위(高麗恃重 孫位) 시조의 부(父)

온양(온陽)

보천(普天)

고려 상서

(高麗尙書)

신라 병마원수 집(兵馬元帥 輯) 시조의 선조(先祖)

해주(海州)

숙(肅)

고려 정랑

(高麗正郞)

 

진주(晋州)

수규(守珪)

고려 내부령

(高麗內部令)

 

초계(草溪)

배걸(倍傑)

고려 상서

(高麗尙書)

 

청주(淸州)

극경(克卿)

고려 낭중

(高麗郎中)

 

나주(羅州)

해(諧)

고려 군기감

(高麗軍器監)

 

봉화(奉化)

공미(公美)

고려 호장

(高麗戶長)

 

이 외 多數 貫鄕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