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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하완
작성일 2013-09-13 (금)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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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 3

정월 26일 병인(丙寅)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장졸과 어영(御營)의 병사들이 성 위에서 내려와 성문 밖에 모여서 척화한 사람들을 적의 진영으로 보내도록 요청 하였다. 이때 신경진이 훈련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 성을 지켰으며, 구 굉은 남쪽 성을 지켰고, 구 이후는 수원부사(水原府使)로서 남문을 지키면서 홍진도와 더불어 비밀로 모의하고 군졸들을 꾀여, 이러한 협박의 변란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고 두렵게 여겼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군사들의 실정이 어떠냐?” 고 물으니 김 류가 대답하기를 “군사들의 동태가 이미 동요하여 물러가도록 권유 하였으나 따르지 않으며 저들의 부모처자가 모두 창칼에 찔려 죽었으니 척화한 사람들을 원수처럼 보고 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진정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그 뜻을 따라 오늘 결론을 내려서 내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일이 이미 위급하다. 세자가 스스로 가려고 하니 오늘이라도 사람을 시켜 말하라.”고 하니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감희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최명길이 말하되 “군사들이 아직까지 배회하면서 물러가지 아니하니 당장 눈앞에서 무슨 변란이 일어날까 신이 두렵습니다. 이것은 대신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 어찌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이 성을 보전하지 못하면 화를 면하기란 매우 어려우니 다 같이 죽을 것이다. 세자의 충성을 가지고 교섭을 시도하여 보라.” 고 하니, 최명길이 이르되 “성교(聖敎; 임금의 말이나 명령)가 지당하오니 이것을 가지고 굳은 약속을 받는 것이 옳습니다. 일이 매우 급박하오니 청하옵건대 신이 나가겠습니다.”고 하였다. 김 류가 불가하다고 반대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이때가 어떠한 때인데 의식의 예법을 갖추려고 하는가?”하였다. 이에 김 류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이 적의 진영으로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말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은 임금이 직접 나오지 아니하면 결단코 듣지 않겠다.” 고 하였다. 윤 방, 한 홍일의 장계와 대군(大君; 봉림대군)의 서찰이 전해와 비로소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것을 듣고 온 성중이 모두 통곡 하였다. 이에 앞서 적이 큰소리로 외치며 군사를 나누어서 강화도를 습격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때 얼음이 얼어 강이 막혀 있음을 믿고, 모두 거짓된 과장이라 하면서도, 한편으로 여러 곳의 수군을 불러 모아 강화유수(江華留守) 장 신에게 통솔토록 명을 내렸다. 이에 충청수사(忠淸水使) 강 진흥이 배를 이끌고 먼저 연미정(嚥尾亭)에 도착하였으나,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수리하면서 모든 장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적의 장수 구왕이 각 진영의 군사를 선발하여 3 만 명이라고 말하고, 삼판선(三板; 항구 안에서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작은 범선) 수십 척에 수레를 싣고 갑관진(甲串津)에 주둔하여 홍이포(紅夷砲; 길이가 두발이고 무게가 삼천 근 되는 화란에서 전래한 대포)를 연발로 발포하니, 수륙군이 황급하게 날뛰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적이 허점을 이용하여 급히 건너오니 장신, 강진흔, 김경징, 이민구 등이 모두 적의 위세를 바라보고 달아났다. 장관 구원일이 장신을 베어버릴 계획으로 군사를 몰아 육지에 내려와 결전을 시도하였으나, 장신이 미리알고 방어하니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두(津頭) 뒷산에 있다가 적의 습격으로 군사가 괴멸(塊滅; 파괴되어 멸망함)되고 자신도 죽었다. 적이 군사를 나누어 성 밖 높은 언덕에 진을 치니, 중관(中官; 내시)이원손(元孫; 임금의 장 손자)을 업고 피해나갔으며, 성안의 관원들이 일시에 흩어졌다. 이에 대군(大君)이 용사를 모집하여 출격 하였으나 대적이 되지 않아 혹은 죽고 혹은 부상하여 돌아왔다. 얼마 후에 적의 대부대가 성을 포위하고 노왕(盧王: 청나라 임금의 아들을 왕이라고 하였음)이 사람을 시켜 성 밑에서 외치기를 “성을 격파하는 것이 쉬운 일이나 군사를 정지시키고 진격하지 않은 것은 황제의 칙명이다. 황제께서 이미 강화(講和)를 허락하였으니 급히 관리를 보내 그 사실을 듣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대군(大君)이 한흥일 에게 말하기를 “적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으나 강화에 대한 말은 이미 들었다. 시험 삼아 가 보도록 하라.” 고 하여 곧 적의 진영으로 가보니 적이 말하기를 “대신이 오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대군이 다시 해창군(海昌君) 윤 방으로 하여금 가도록 하여 윤 방의 가마가 진중으로 들어갈 새 윤 방이 말하기를 “늙고 병들어 죽게 되어서 사람으로서 예의를 차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좌우에서 칼을 들고 위협하니 노왕이 중지시키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강화인 만큼 대군을 청하여 서로 말하겠다.” 고 하였다. 윤 방이 돌아와 대군이 말하되 “저들이 좋은 뜻으로 나를 유인하는 것인지 진실로 예측 할 수 없으나 일찍이 들으니 세자께서 가려고 청하였다 하였다. 참으로 이 위급한 사태가 풀리는 일이라면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면서 적의 진영에 이르니 노왕이 통 역을 시켜 인도하고 들어가 예절을 취했다.

저녁 때, 대군이 노왕과 더불어 말을 나란히 타고, 성에 들어올 새 성 밖에, 군사들을 머물게 하고 동서로 길을 나누어 피차간 서로가 짓밟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군사를 거두어 살육을 못하게 하였다. 여러 진영으로 하여금 붙잡힌 남녀들을 돌려보냈으며 대군에게 청하여 임금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여러 신하로 하여금 장계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틀 뒤에 통역관이 돌아와 말하기를 “임금이 장차 황제를 만나보고 곧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대군과 빈궁과 여러 신하들도 곧 돌아가게 된다.” 고 하였다. 당초 피난길을 떠날 때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의 자손으로 궁궐 안에 피신하여 있다가 자결한 사람이 십여 명 있었다. 그 이튿날 노왕이 도로 강을 건너갔다. 몽고 병이 난을 일으켜 불태우고 파헤쳐서 죽이고 약탈하여 남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윤 방이 종묘사직 신주를 받들고 성중에 남아 있다가 위급하여 종묘의 사당 및 땅속에 신주를 묻었더니 이때 몽고 병의 도굴로 인하여,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를 잃었다고 하였다. 임금이 홍서봉 등을 불러보니 최명길이 이르되 “청나라 사람들이 언제나 말하기를 강화도를 공격 한다고 하더니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울면서 말을 못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천하 만고에 어찌 이와 같은 환란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윤 방의 장계를 내어 보이니 최명길이 이르되 “빈궁 이하를 자못 예의로 대하며 재상의 가족들도 역시 많이 거느리고 왔다고 일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신이 강화도에서 올라온 장계를 살펴보니, 네 사람의 서명이 똑같아, 한 사람이 쓴 글씨 같습니다.

모사하여 우리들을 속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윤구를 시켜 윤 방의 서명을 감정하여 보았으나, 윤구 역시 자세하게 분별하지 못하였다. 대신 및 최명길이 청대하여 이르되 “강화도에서 올라온 장계는 위조인 듯합니다. 대군의 사찰은 진실한 것이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되 “대군의 서찰은 진실한 것이며 서신중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다만 강화의 일로 나가 보았다고 하였을 뿐이라?” 고 하였다. 김 류가 이르되 “장계 속에, 김경징, 이민구의 이름이 없으니 생각건대,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곳에 있었거나, 또는 전사한 까닭인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나는 생각에 외부에 달아나서 피난한 까닭으로 장계 속에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또, 오늘의 요청 으로 화가 조금 누그러질 줄 알았더니 저들 역시 머리를 저어니 대책을 어이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되 “외로운 성의 형세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하였으며 저들이 또 강화도까지 새로 얻었으니 그 뜻이 한창 교만하여졌습니다. 혹시 지체하다보면 어떠한 화가 있을 런지 실로 예측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으며 이홍주가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반드시 성상(聖上: 임금을 높여서 하는 말)의 마음속에 단정을 하신 뒤에라야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 신하로서는 차마 진언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최명길은 “지금이라도 속히 결단을 내리시면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형세가 이미 궁박하여 졌으니 차라리 자결하고 싶다.

저들이 이미 여러 빈궁을 거느리고, 인질로 삼았으니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저들의 문서에 한 말은 모두 헛말이 아닌 듯하옵니다. 성을 나가면 생존 할 수 있는 것과 위태로운 것이 반반이 되옵고 성을 나가지 않는 다면 전부 멸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상께서 뜻을 결정하신다면, 이로 말미암아 회복할 기초가 되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조(前朝; 옛날의 조정)에서도 역시 나가 보았다고 이르니 어떠한 사세였는지 모르겠으나 고사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고 하니 최명길이 말하되 “내일 결단을 하시렵니까? 먼저 국서를 가지고 약정한 뒤에 결단을 내리실렵니까? 표문(表文;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말)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고 한데, 임금은 “어찌 꼭 표문이 있어야 되겠는가?” 하였다. 삼사가(三司)가 청대하고 통곡하며 아뢰기를, “명일이면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을 하여야 되오니 생민 이래로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지난날의 역사를 역력히 살펴 보건대 짐승들에게 항복하고 화를 면한 사람이 몇 사람 이나 있었습니까? 성 중에 식량이 족히 수십 일은 지탱할 수 있는데도 내일 성을 나간다고 하오니 이것이 어떠한 계획이옵니까? 더구나 교활한 오랑캐의 흉계는 실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한 번 성을 나간 뒤에는 후회막급이 될 것 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경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당초에 나의 뜻은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성을 등지고 한판 싸워 어떠한 결판을 내려고 하였더니 군사의 정세가 변하였고 제반 사태가 크게 달라졌다. 밤낮으로 바랐던 것은 강화도의 안전 확보 였 더니 지금은 강화도를 적에게 빼앗겨 나의 며느리와 백관들의 친족 들이 거의 구속되고 말았다. 내가 비록 홀로 산다고 한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다시 보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통곡하고 나갔다.

 

 

정월 27일 정묘(丁卯)

 

부제학(副提學) 이경석, 집의(執義) 이명웅 등이 세자로써 성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무마하고 국정을 보살피도록 청하니 임금이 대신들과 협의해 결정하라고 하였다. 이흥주, 김신국, 최명길이 국서를 받들고 적의 진영으로 갔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왕 신 아무는 삼가 대 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신이 본월 20일에 받든 성지(聖旨)에 이르되 “지금 내가 곤궁하게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으니 짐이 넓은 도량을 활짝 열고 너희들 스스로 심기일신토록 허용하겠다.  너의 출성을 명령한 것은 첫째로는 네가 진심으로 짐에게 열복 하는가를 보고 둘째로는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 너희 나라를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회군한 뒤에 짐의 어질고 신의 있음을 온전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얻어 사방을 평정함에 너희전과를 용서하여 장차남조(南朝)에 표본으로 삼으려는 것 이었다. 만약 속임수로 너를 취한다면 광대한 천하를 다 속임수로 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방에서 귀순 하려는 기를 끊어버리는 것이 된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황제의 칙서를 받고부터 천지와 같이 용납하고 덮어주신 큰 은덕에 더욱 감격하여 귀순할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였으나 자신을 돌아보니 쌓인 죄가 산과같이 많이 있습니다.

폐하의 은혜롭고 신의 있고 밝으신 말씀이 내리실줄 모르는 바는 아니오나 하늘이 내려 보는 앞인지라 오히려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날을 배회하면서 또 다시 포만한 죄를 더 쌓았습니다. 이제 듣건대 폐하께서 돌아가실 날자가 며칠 남지않았다고 하오니 만약 속히 나아가 용안을 뵙지 아니하면 작은 정성이나마 드릴 것이 없어지고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신이 방금 3백년 종묘사직과 수 천리의 백성들을 폐하에게 부탁하오니 정리(情理)에 참으로 가련하옵니다. 만약 혹시라도 일에 어긋남이 있으면 칼을 뽑아 자결하는 것이 더 옳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어진 덕으로 피맺힌 정성을 굽어 살피시고 밝으신 조칙을 내려 주시와 신이 안심하고, 명령에 귀순할 길을 열어주소서. 하였다.   마부대가 글을 받고 이르기를 “당장 황제에게 품달하고 날짜를 결정하여 회보하겠다.” 하였다.

 

 

정월 28일 무진(戊辰)

 

삼정승이 청대하고 말하기를 “어가가 성을 나가시면 마땅히 세자께서 성중에 머무시게 되오나 가고 머무는 권한은 적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오니 저들이 만약 나오라고 요청하면 어떻게 응대하여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저들이 혹시 함께 나오라고 요청하면 어찌 거절하겠나?”고 하니 김 류가 말하되 “오늘 마땅히 척화한 사람들을 잡아 보내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숨겨주고 바른대로 가르치지 아니하옵니다. 저들이 이미 정묘 년의 맹세를 저버린 주모자로 말하였으니 작년 봄에 논주(論奏: 임금에게 주청하는 것)한 사람과 그 뒤에 준론(峻論: 준엄하고 심각하게 말하는 것)한 사람들이 마땅히 스스로 책임을 져야합니다.

지금 자수한 사람 외에도 작년 봄에 그 일을 말한 사람들이 한 둘 뿐이 아닙니다. 이미 그 경중(강화와 척화에 대한 비중인 듯)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 무엇을 취하고 버리겠습니까? 신들의 뜻은 그 당시의 삼사와 오늘의 자수자를 다함께 잡아 보내면, 저들은 반드시 많이 잡아 보내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되 “저들이 잡아 보내는 사람의 많은 것으로써 용서한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 용골대가 한(汗)의 글을 가지고 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諭)한다. 방금 올린 글을 보니 20일 짐이 내린 조서의 뜻을 함께 진술하고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근심하면서 밝은 조칙을 내려 안심하고 명령 귀순할 길을 열어 달라고 한 것은 짐의 식언(食言)을 의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짐이 본래 성심으로 대하였으니 특별히 전일의 말만을 실천할 뿐 아니라 뒷날의 유신을 위하여, 전일의 모든 죄를 다 풀어주고 유약을 자세하게 정하여 대대로 지켜나갈 군신 간의 신의로 삼겠다. 네가 만약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심기 일신하여 짐의 은덕을 잊어버리지 말고 짐의 명령에 몸을 맡겨 자손들의 영구한 계획으로 삼는다면 명나라 조정에서 내려준 고명(誥命: 천자가 내리는 유시와 명령)과 책인(冊印;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는 칙서와 인장) 헌납(獻納; 소국에서 대국으로 바치는 물품) 등 그들과의 우호를 끊으며 그 연호를 버리고, 모든 문서에는 나의 정삭(正朔; 달력 즉 연호를 말함)을 받들라. 너의 장자와 둘째 아들 두 사람을 인질로 하고 여러 대신들도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을 아들이 없는 사람은 아우를 인질로 하라. 네가 만약 뜻밖에 일이 있으면 짐이 인질로 하였던 아들을 세워 왕위를 승계토록 하여 주겠다. 짐이 만약 명나라 조정을 정벌할 때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시켜 군사와 말 수군 등을 조달토록 하거든 그 기일과 장소를 어기지 말아야 한다. 짐이 지금 회군하여 단도(緞島)를 공격할 것이니, 네가 50척의 배를 내어주고 수군, 창, 포, 화살, 등을 스스로 대비할 것이며, 짐의 군사가 돌아갈 때 호군(縞軍;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것)의 예를 드리라.

또 성절(聖節; 천자의 생일), 정조(正朝; 정월 초하루), 동지, 중궁천추(中宮千秋; 태자의 생일)및 그 밖의 길흉사에 경조의 예절을 드리되 대신과 대관을 명하여 표문(表文; 천자나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받들고 오게 하라. 그리고 그 표문과 전문(箋文; 역시 천자나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격식과 짐이 내리는 조칙 혹은 일이 있을 때 사신을 시켜 전하는 칙서는 너와 사신이 서로 볼 것이며 혹 너의 신하들이 짐을 알현하거나 사신을 영접 전송 할 때의 예절은 명나라 조정의 옛 법도를 어기지 말라.

군중(軍中)에 잡혀있는 포로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에 도망하여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본주(本主; 본래의 주인)에 잡아 보낼 것이며 만약 죄를 풀어주고 돌려보내고 싶으면 본주의 편의에 따르도록 하라. 나의 병사가 죽음으로 싸우다가 포로 된 사람은 이 뒤에 차마 결박하여 보내지 못 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서로 혼인을 맺어 사이좋게 할 것이며. 신구 성곽은 수선증축을 말며 너의 나라에 있는 올량합(兀良哈; 만주족 여진족)사람을 함께 돌려보내라. 일본과의 무역은 옛날처럼 너희들에게 따를 것이다. 다만 그들의 사자(使者)를 인도하여 나의 조정으로 오면, 짐도 역시 그들에게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다. 동쪽 올량합 사람으로 저들에게 도피하여 살고 있는 사람과는 서로 무역을 금하고 만약 보거든 잡아 보내도록 하여라.

이미 죽었던 너의 몸을 짐이 다시 살렸으며, 망하려고 하는 너의 종묘사직을 온전하게 하여 주었으며, 이미 잃었던 너의 처자들을 완전하게 하여 주었으니, 너는 마땅히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을 생각하여 뒷날 자자손손 신의를 저버리지 말고 오래도록 국가를 보존토록 하라.

짐이 너희 나라가 교활 반복한 까닭에 이와 같이 교시한다.

 

 

숭덕 2년 정월 28일.

 

또한 해마다 폐백으로는 황금2백량, 백은(白銀) 1천량, 물소 뿔의 활 2백개, 호피(虎皮) 1백장, 녹피(鹿皮) 1백장, 차(茶) 1천포, 수달피 4백장, 청서피(靑鼠皮)3백장, 호초(胡椒)열 말, 호요도(好腰刀) 26파, 소목(蘇木) 2백근, 호대지(好大紙) 1천권, 순조(順조)10파. 호소지(好小紙)1천5백권. 오조룡석(五爪龍席)4장. 각양(各樣) 화석(花席)40장, 흰 모시 2백필, 각색 비단 2천필, 각색 세모베 1만필, 무명베 1천4백필, 쌀 1만포를 정식으로 한다.”고 하였다.

홍서봉 등이 나가서 칙서를 맞이할 새 용골대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명나라 조정의 칙서를 받들 때 의식이 어떠하였느냐?”고 물으니, 홍서봉이 대답하되 “칙서를 받든 사람은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 우리나라의 신하)은 꿇어앉았다.” 고 하여 그 예에 따라 칙서를 주고받은 뒤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근일의 심한 추위에 괴로움은 없었는가? 하고, 안부를 물어, 홍서봉이, “황제의 살펴주신 은혜로 괴로움을 면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용골대가 이르되 “삼전포(三田浦)에 수항대(受降臺; 항복을 받는 곳)를 이미 쌓았으며, 황제가 서울에서 곧 내려올 것이니 내일 예의를 실행토록 하되 면박(面縛; 두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앞으로 보게 하는 것) 여츤(與츤; 널을 수레에 싣고 죽으로 간다는 뜻을 표시하는 것)같은 허다한 절차는 다 제외하겠다.”고 하여 홍서봉이 이르되 “우리 국왕은 용포(龍袍)를 입고 있는 바 이 옷으로 나오면 되는가?” 고 물으니, 용골대가 “용포는 입을 수 없다.” 하였다. 또 홍서봉이 남문으로 나오면 되느냐고 물으니 용골대가 죄 지은 사람이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옛날 예법을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조참판 정온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 배를 찔렀으나 죽지는 않았으며 예조판서 김상헌도 역시 여러 날 식음을 끊었다가 이날 목을 매었으나 아들의 구원으로 죽지 않았으니 듣는 사람들이 다 경탄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가 적과 더불어 금화에서 크게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정월 29일 기사 (己巳)

 

최명길, 이 영달에게 국서를 주어 적의 진영으로 보내는 한편 척화(斥和; 화의하는 것을 물리침)한 신하 윤 집, 오달제를 잡아 보냈다.

국서에 이르되 “일찍이 소방에 일종의 근거 없는 뜬 말을 유도시켜 국사를 그르친 까닭에 작년 가을 신이 그중 제일 심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축출 하였으며 앞장서서 주창한 대간 한 사람은 대국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평양서윤으로 보내 즉시전진토록 명령 하였더니 혹은 대국의 군사들에게 잡혔는지 혹은 샛길을 따라 부임하는 도중에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이 성중에 있는 자로서 부화뇌동한 죄가 있으나 전에 쫓겨난 사람에 비하면 경중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신이 만약 어렵게 끌고 나가서 폐하께서 본국 사정을 살피시지 못하고 신이 숨겼다고 의심하시면 신의 진심을 자백할 수 없을까 두려운 까닭에 두 사람을 적발하여 진영으로 보내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고하였다.

최명길이 두 사람을 거느리고 적의 진영에 나아가니 한(汗)이 그 결박을 풀게 하고 최명길 등을 불러 앉게 한 뒤에 주연을 베풀고 초구(돈피로 만든 갖옷)한 벌씩을 주니 최명길 등이 입고 사배하였다.

 

 

정월 30일 경오(庚午)

 

용골대와 마부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이 남색 옷에 백마를 탔으며 모든 의장(儀仗)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명을 거느리고 서쪽 문으로 나가니 세자가 뒤를 따랐다. 뒤에 남은 백관들은 서쪽 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 하였다.

임금이 산을 내려가 가시를 깔고 않았으니 조금 뒤에 갑옷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명이 달려왔다.

임금이 이르되 “이들은 무엇 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들은 우리나라의 영봉(迎逢; 맞이하고 접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또 조금 뒤에 용골대 등이 당도하니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여 두 번 읍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의 말을 하니 임금이 대답하되 “오늘의 일은 오직 황제의 말과 두 분 대인의 완곡한 주선을 믿는다.” 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뒤로는 두 나라가 한집이 되었으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고 해가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가자고 하였다. 임금은 삼정승과 판서, 승지 각 다섯 사람과 한림원 (翰林源) 주서(注書) 각 한 사람을 거느리고 세자는 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의 관원들을 거느리고 삼전포로 나아갔다.

한(汗)을 바라보니 황옥(黃屋; 임금이 타는 수레의 자루가긴 양산)을 벌려놓고 앉았으며 갑옷에 활과 칼을 찬 군사들이 방진(方陳; 네모꼴로 친 진영)을 치고, 좌우로 옹립하여 울리는 각종 풍악은 중국의 제도를 약간 모방한 것 같았다.

임금이 걸어서 진영 앞에 이르니 용골대 등이 임금을 진영의 동쪽에 머물게 한 뒤에 용골대가 한(汗)에게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서 한의 말을 임금에게 전하였으니 이르되 “지난날의 일들을 말하려고 하면 길어진다. 이제 용감한 결단으로 여기에 왔으니 매우 기쁘고 다행한 일이다.” 라고 하니 임금은 “천은이 망극하다.” 고 대답하였다.

용골대 등이 들어가 단 밑에 북향으로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을 안내하여 자리에 나아가게 한 뒤,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여唱; 위의 말을 아래에 전하는 것)하고 임금이 삼배 구고두(三排九叩頭;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닿는 것)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임금을 인도하여 진영의 동문으로 나갔다가 다시 동북쪽 구석으로 들어와 단의 동쪽에 앉게 하였으며 강화도에서 잡혀온 대군이하 여러 사람들은 단의 서쪽 아래에 열을 지어 서게 하였다.

한(汗)이 용골대에게 말하여 임금을 단에 오르게 하여 한은 남쪽을 향하여 앉고 임금은 동북쪽 구석에 서쪽을 향하여 앉았다.

그밖에 왕자 세 사람이 차례로 앉고 세자가 그 아래에서 서쪽을 향하여 앉았다. 또 청나라 왕자 네 사람이 서북쪽 구석에 동쪽을 향하여 앉고 29군이 그 아래에 연좌 하였다. 우리나라 배신(培臣)들은 단 아래 동쪽 구석에 앉았으며 강화도에서 잡혀온 여러 신하들은 단 아래 서쪽 구석에 앉았다. 차를 한 잔씩 돌린 뒤에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 신하들에게 고하되 “지금은 두 나라가 한 집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자 하노니 각기 기능을 다하여 쏘아보라.” 하였다.

이에 우리나라 신하들이 대답하되 “여기에 온 사람들은 모두 문관인 까닭에 활을 쏘지 못한다.” 고 하니 용골대가 강요하였다.

위솔(衛率) 정이중이 할 수 없이 나가 쏘았으나 활과 화살이 우리나라 제도와 달라서 다섯 번 쏘아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에 청나라 왕자 및 여러 장수들이 몰려와 함께 쏘면서 희롱 하였다. 조금 뒤에 주연을 차려 술이 세 차례 돌아간 뒤에 술상을 거두도록 명령 하였다. 술상을 막 거두려고 할 때 한의 시종자 두 사람이 제각기 개를 몰고 한의 앞에 오니 한이 몸소 고기를 썰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임금이 물러나올 새, 용골대가 빈궁 이하 사대부의 가솔들에게 한의 말이라고 하면서 빈궁과 대군의 부인들을 한에게 절을 하도록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으나 실제로는 나인들을 대신 시켰다고 하였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달하되 “당초 이 물건을 서로 줄려는 뜻으로 가져왔으나, 지금 와서 보니, 본국의 의상제도가 달라 억지로 입으라고 하지 못하고 다만 인정을 표시할 뿐이라.”하였다. 임금이 입고 뜰로 들어가 사례한 뒤에 도승지 이경직을 시켜 국보를 받들고 나아가니 용골대가 받아갔다. 조금 뒤에 와서 묻기를 “고명(誥命)과 옥책(玉冊; 임금과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지어서 새긴 간책)은 어찌하여 드리지 않는가?”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 변란으로 잃어버렸으며 고명은 강화도로 보냈더니 전란 중에 보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보존되었으면 추후 헌납하겠다.“ 고 하여 용골대가 수긍하고 돌아갔다. 또 초구 세 벌은 삼정승에게 다섯 벌은 다섯 판서에게 또 다섯 벌은 다섯 승지에게 입게 하고 이르되 “산성에서 임금을 받드느라고 수고가 많았던 까닭에 이것을 기증한다.” 고 하니 받은 사람들 모두가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 장유가 들어가 뜰에 엎드려 노모를 찾아보도록 요청하니 금석을시(金石乙屎)가 노하여 꾸짖었다. 임금이 밭 가운데 내려앉아 그 진퇴를 기다리다가 해질 무렵에 비로소 서울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세자와 빈궁 및 두 사람의 대군과 그 부인들은 모두 유치하였으니 북쪽으로 데려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물러나와 막사에 들려 빈궁을 보고 최명길에게 호위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소파진(所波津)을 배로 건널 새 나루터의 병졸들이 모두 죽고 빈 배만 두 척이 있었다.

이에 백관들이 다투어 먼저 건너려고 어의를 붙잡고 배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임금이 이미 건넜을 때 한이 뒤를 따라 달려와 얕은 여울로 건너와서 상전(桑田)에 이르러 진중에 전달하고 용골대로 하여금 호위군을 이끌고 도로의 좌우를 따라 임금을 호위하여 가도록 하였다. 이때 포로로 잡혀있는 자녀들이 임금의 행렬을 바라보고 울부짖으면서 “우리 임금 우리 임금 나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으며 길의 좌우에서도 울부짖는 사람들이 만 명이나 되었다. 인정(人定; 사람이 잠자리에 들 시각. 오후10시 경)때에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에 들어갔다.

 

 

2월 초하루 신미 (辛未)

 

이때 몽고 병이 성 중에 남아있어 백관들이 모두 궁궐로 들어갔다.

여염집은 대다수가 불타버렸으며 거리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많이 있었다. 임금이 양화당에서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를 접견 하였다. 이 자리에서 용골대가 황제의 명령으로 고려의 옥인(玉印; 임금의 도장)과 신경원(申京瑗) 부원수의 직인을 바침에 임금이 사례하였다. 인하여 임금이 말하되 “몽고 병이 아직까지 도성 안에 있으면서 침략을 자행한다.” 고하니 용골대가 즉시 그 부하를 불러 “몽고 병을 성 밖으로 몰아내고 성문을 굳게 지키라.” 고 하였다.

또 용골대가 이르되 “황제가 내일이면 반사(班師;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는 것)할 것이니 나와서 전송하여 달라.”고 하여 임금이 응낙하고, 포로들을 돌려보내 주도록 청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황제의 처분이 있을 것이라.” 고 응답하였다.

임금이 또 해마다 바치는 곡물의 준비가 매우 어렵다는 실정을 말하니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말하되 “귀국 사정을 황제가 직접 목도하였으니 재명년(다음 다음해)부터 시행토록 하라.” 고 하였다.

청나라 사람들이 세자 및 빈궁과 봉림대군 및 그 부인은 진중에 머물러 있게 하고 인평대군과(麟坪大君)과 그 부인은 서울로 돌려보냈다.

 

 

2월 초 2일 임신(壬申)

 

청나라 한이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갈 새 임금이 전관장(箭串場)까지 전송하러 나가니 한(汗)이 높은 언덕위에 앉고 임금을 여러 왕(한의 아들)의 윗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때 다만 도승지 이경직 혼자만이 임금을 시종하였다.

각도의 군사들을 해체하여 돌려보내고 산성에 머물러 있는 백관들이 서울로 돌아올 때 도중에서 적병들의 약탈을 받았으며 병조참지(兵曺參知) 이 상급은 노상에서 얼어 죽었다. 이에 임금이 염습과 장사에 필요한 용품을 하사하였다.

청나라에서 단도(檀島)를 습격하려고, 경 중명(耿 仲明)과 공 유덕(孔 有德)으로 하여금 전선을 준비토록 하고 또 우리나라에 수군을 조달케 하였다. 이에 신천군수(信川郡守) 이 수원과 영변부사(寧邊府使)이 준에게 명령하여 황해도의 전선을 이끌고 달려가게 하였다. 그런데 경증명과 공 유덕은 명나라 조정을 배반하고,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였다

 

 

2월 초 3일 계유(癸酉)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대궐에 이르렀다. 임금이 불러보니 용골대가 정명수를 시켜 말을 전하였다. 정 명수는 평안도 은산(殷山)의 노예로 적에게 포로 된 자라 본성이 교활, 음흉하였으며 우리나라 사정을 한(汗)에게 밀고한 까닭으로 한이 믿고 아꼈다.

 

 

2월 초 4일 갑술(甲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 윤 방이 강화도에서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다. 임금이 불러보니 윤 방이 임금을 보고 울었으며 임금도 역시 울면서 어제 밤에 신주를 모셨던 곳을 물었다.

윤 방이 대답하기를 “어제는 밤이 깊어 아뢰지 못하고 신의 처소의 청결한 곳에 모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예관에게 명하여 시민당(時敏堂)에 모시도록 한 뒤에 근신들을 인솔하고 곡배례(哭拜禮; 신주 앞에서 곡(哭)하면서 절하는 것)를 행하였다.

 

 

2월 초 5일 을해(乙亥)

 

세자가 적의 진영에서 돌아와 하직을 고하고 청나라로 떠날 때 모든 신하들이 연도에 서서 울음으로 전송 하였으며 심지어 말고삐를 잡고 울부짖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세자가 오래도록 말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정명수가 채찍을 휘두르면서 큰소리로 세자의 출발을 독촉 하였다. 세자를 수행하는 신하로는 재상 남이웅, 좌부빈객(左副賓客) 박황, 우부빈객(右副賓客) 박로, 보덕(輔德) 이명웅, 필선(弼善) 민응협, 문학(文學) 이시, 사서(司書) 정뢰경, 설서(設書) 이 회 및 익위사(翊衛司) 관원 세 사람만이 따랐으니 우의정(右議政) 이성구가 계사를 올려 청나라에 흉년으로 기근이 심하니 세자의 시종관을 줄여 보내도록 청한 까닭이었다.

 

 

2월 초 6일 병자(丙子)

 

임금이 성산(城山) 진중으로 가서 구왕(九王; 한의 아들인 듯)을 만나 보았으니 성산의 성의 서쪽 10리터에 있는 곳이다.

 

 

2월 초 7일 정축(丁丑)

 

임금이 세 번째로 근신을 보내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송환하여 달라고 청하니 남녀 1천6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2월 초 8일 무인(戊寅)

 

구왕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감에 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대군 부인이 청나라로 향발 하였다. 이때 임금이 창릉(昌陵)까지 행차하여 그 일행을 전송할 새 길가에 말을 세우고 구왕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구왕에게 말하기를 “옳게 가르치지 못한 아이를 딸려 보내니 대왕이 잘 지도하여 달라.” 고 하였다. 구왕이 이르되 “세자의 나이가 나보다 많으며 그 일 처리하는 것을 감히 내가 가르치고 지도할 바가 아닙니다. 하물며 황제께서 후한 예우를 할 것이오니 원컨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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