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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하완
작성일 2013-09-10 (화)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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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난중일기<저자: 정지호>2

정월 초 3일 계묘 (癸卯)


 

동양위 신익성 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 오랑캐의 서신을 태워버려 사기를 장려하고 대의를 신장 시키라” 고 하였으나 상소에 대한 회답은 없었다.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 등에게 다시 국서를 주어 오랑캐의 진영으로 파견 하였으니 그 글에 이르되 “조선 국왕 아무는 삼가 대청나라의 관온 인성 황제 페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小邦)에서 대국을 거역하고 병화를 자초하여 외로운 성안에서 몸을 의지 하고 있으니 위태로움이 조석에 박두 하였습니다. 사신을 시켜, 서찰을 받들고, 충정을 전달코자 하였으나, 전쟁으로 서로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어제 황제께서 누처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 하면서 희로가 교착 하였습니다. 이에 대국에서 옛 맹세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밝은 가르침을 내리시어 스스로 죄를 알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소방의 심사를 덜 수 있는 때입니다. 정묘 년에 강화를 맺은 이후로, 10년간 소방에서 닦아온 독실한 인정과 공손한 예절은 다만 대국에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로 황천(皇天)이 살피는 바이오며, 지난해의 일은 소방에서 그 죄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역시 소방의 신민들이 식견이 천박하여 명분과 의리 만을 고수한 데에 말미암아 마침내 사신으로 하여금 노여움을 사서 빨리 떠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소방의 군신들이 지나친 염려로 문신들이 글을 지으면서 서로의 뜻이 어긋나 대국의 노여움을 범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감히 신하들이 한 일이니 내가 알바 아니라고 말하겠습니까? 명나라는 부자(父子)의 나라였으나 대국의 병마가 입관(入關 )할 때 소방에서 한 개의 화살도 서로 겨누지 않았으며 이것은 형제의 명세가 중하였기 때문입니다. 모해라는 말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이것 역시 소방의 정성이 부족하여,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 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은 소방이 지은 죄로 알고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징벌하고 죄를 알고 스스로 뉘우치면 용서 하는 것이 하늘마음을 체득하여 만물 을 수용하는 대국의 할일일 것입니다. 만약 정묘 년 하늘에 맹세한 정리를 생각하고 소방의 백성들의 생명을 구출하여 소방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처, 새롭게 하도록 하여 준다면, 소방으로서는 오늘부터 마음을 씻고, 힘을 다하여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대국에서 관용 할 줄 모르고, 끝까지 싸우겠다면, 소방에서도 부득이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 대항할 뿐입니다. 감희 흉금을 전달하고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하였으니 이 글은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이때 청나라 연호를 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삼사에서 반대 하여 중지되었다.


 


 

정월 초 4일 갑진(甲辰)


 

황해도 관찰사 이 배원,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 등의 장계가 들어왔으며 유도대장 심기원이 서울을 버리고, 광능{光陵)으로 물러났다.

사간(司諫) 이 명웅, 교리(校理) 윤 집, 정언(正言) 김 중일, 수찬(修撰) 이상형, 등이 청대하여, 최명길의 죄를 다스려 군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문이 위급할 때 이조판서(최명길)가 뛰어가서 적의 예봉을 이완 시켰으니 나라를 위한 성의가 가상하다. 지금 여러 재상들이 저들(적)에게 속임을 당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터에 유독 최명길의 죄만을 다스린다면 그 또 한 원통하지 않겠나?” 하였다. 협수사(協守使) 기평군 유백증이 윤 방과 김 류를 탄핵하는 소를 올려 그 소가 들어갔으나 김 류가 미처 임무를 살피지 못하고, 데리고 들어갔다. 임금이 즉시 불러보고 내보낸 다음 유백증의 소에 대신들을 공박하였다는 이유로 유백증을 파면토록 명하였다. 이때 조정에 재상들을 협수사라는 직명을 주어 성안의 사대부들을 이끌고 북쪽 성을 지키는데 가세하도록 하였던바 유백증을 파면하고 이 무를 대신 임명하였다.


 


 

정월 초5일 을사(乙巳)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룡이 응원군을 이끌고 광교산(光敎山; 수원과 용인 사이)에 이르러 승전하고 전진하는 상황을 아뢰어 왔다.

이때 남한산성이 오래 동안 포위되어 안팎으로 내왕과 통신이 끊겼다가 이때에 와서 응원 병의 소식이 계속 들어오니 성안에서는 안전하다고 믿었다.

정월 초 6일 병오(丙午)

강원감사 조정호가 장계를 올리고, 아울러 말린 꿩 네 마리를 진상하였다. 그 장계에 이르기를 “춘천영장(春川營將) 권정길이 군사를 이끌고 검단산(檢丹山)에서 여러 번 싸워 이겼으나 별안간 적군으로부터 후방을 엄습당하여 붕괴되었으며, 용진(龍津)에 주둔하여 남은 군졸을 수습하고, 북쪽의 응원군을 기다려 합세 진격할 대책을 세웠다.”고 하였다. 함경도 감사 민 성휘가 군사를 이끌고 강원도 금화 현에 달려와 장계를 올렸다.


 


 

정월 초 7일 정미(丁未)


 

임금이 중관(中官; 내시)을 시켜 성을 지키는 장졸들을 위로 하였다.


 


 

정월 초 8일 무신(戊申)


 

임금이 관량사(管粮使: 양곡을 관장한 관리) 나만갑을 불러, 군량의 방출한 수량과 남아있는 수량을 물었다. 나만갑이 대답하기를 “당초 6천여 섬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제 2천8백여 섬이 남았다.” 고 아뢰며 오래도록 지탱 할 수 없다.” 고 전달하니 임금이 이르되 “군량을 맡은 자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말고 항상 오래도록 버틸 계획 을 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정월 초 9일 기유(己酉)


 

김 류, 홍서봉, 최명길, 등이 적진에 사신을 보내도록 청하여, 임금이 따랐다. 이때 예조판서 김상헌, 대사간 김 반, 집의 채유후, 교리 김 익희, 등이 청대하여 ‘사신을 보내면 안 된다.’ 는 뜻을 전달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정월 초 10일 경술(庚戌)


 

온조왕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정월 11일 신해(辛亥)


 

김 류, 홍서봉, 최명길, 등이 청대하여, 국서를 보내도록, 김 류가 굳이 청하였다. 임금이 국서의 초안을 보고, “고칠 곳이 없느냐?” 고 물으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어전에서 품신하며 고치겠다.” 고 하면서, 붓을 잡고, 자구(字句}를 고쳤으니, 그 글에 이르되,

“근자에 소방의 재신(宰臣; 재상)들이 군문(軍門)에 글을 올려 품청하고 회답을 청한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차 황제의 명령이 있을 것으로 믿고, 소방의 군신들이 목을 늘어뜨리고 날마다 명령을 기다린 것이 벌써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 시비간 회신이 없으니 사세 급박하여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이 글을 올립니다. 바라건대 황제께서 살펴주소서. 소방이 전일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 형제의 의를 맺고 천지신명에게 분명히 고하였습니다. 비록 강장(疆場; 국경)의 분계선은 있으나 정의(情誼)는 간격이 없어 자손만대의 무궁한 복으로 여겼더니 어찌하여 반혈(盤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의흔(疑痕)이 생겨 위급한 병화에 처하여 거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까닭을 찾아보면 모두 천성이 유약하여 여러 신하들의 그 룻 됨을 살피지 못한 데에 연유하여 오늘의 사태를 저질렀으니, 스스로를 책망할 따름입니다.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이 아우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알았으면 꾸짖고 관용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한 일이오며, 지나치게 엄한 꾸중으로 형제간의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면 어찌 하늘이 괴상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방이 해동의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군사 같은 것은 일삼지 않았습니다. 약한 힘으로 강한 것에 굴복하고 작은 것으로서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항상 한 이치라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서로 겨룰 수 있겠습니까. 다만 대대로 명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명분이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일찍이 임진년 난리에 있어 소방의 위급이 조석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때 신종황제께서 온천하의 군사를 총 동원하여 급박한 처지에 놓여있는 소방의 백성들을 구제하여 주었으니 소방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은혜가 마음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차라리 대국에 대하여 죄를 얻는 일이 있더라도, 명나라를 차마 버릴 수 업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두터운 은혜로 사람을 깊이 감동시켰던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이 한 가지 뿐만 아닙니다. 진실로 그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고 종묘사직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데에 있어서 군사를 동원시켜 구제하여주는 것과 군사를 철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 하도록 하여주는 것이 있으니 일은 비록 다르나 그 은혜는 한 가지입니다. 지난해 소방에서 한 일이 잘못되어 대국의 은근한 가르침을 여러 번 받았는데도 오히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제 만약 지나간 일을 버려두고 스스로 심기 일신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도록 허락하여 주시와 오래도록 대국을 섬기게 되오며 소방의 군신들이 그 감격함을 마음 깊이 새겨 자손 대대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온 천하에서 이 말을 들으면 대국의 위신에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대국의 이 한 번 거사로, 동쪽나라에 큰 은혜를 심어주고 그 칭송이 사방으로 넓어질 것입니다. 그렇질 못하고 오직 한때의 분을 참지 못하고 끝까지 병력을 다하여 형제의 은의를 해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아버리며 여러 나라의 여망을 끊어 버리면 대국으로서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의 고명하신 지략으로 어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겠습니까? 가을에는 만물을 죽게 하고, 봄에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며 약한 것을 불상하게 여기고 망하려는 것을 구제하는 것은 뛰어난 임금의 업적이옵니다. 지금 황제께서 영특한 지략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하고 큰 이름을 새롭게 ‘관온인성(寬溫仁聖)’의 네 글자를 우두머리에 게시하였으니 장차 천지의 이치를 실천하고 뛰어난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업적을 확장하시려는 것이옵니다. 소방이 원하는바 전일의 허물을 고치고, 넓은 은혜에 붙이려는 것을 반드시 저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짐작 되옵니다. 이에 다시 구구한 사연을 전달코자 집사에게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정월 12일 임자(壬子)


 

국서를 오랑캐의 진영에 보냈다.


 


 

정월 13일 계축(癸丑)


 

홍서봉, 최명길, 윤 휘, 등이 청대하고 홍서봉이 말하되 “오랑캐의 통역 이 신검이 와서 하는 말이 일찍이 정묘에 유해(劉海)를 유인하여 그 힘으로 강화가 이루어질 것 같다.” 하더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르되 “옛날에도 역시 시행한 사람이 있었으니 반드시 비밀리에 시행하여 절대로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 하고 은(銀)1천양은 정 명수 에게 주고 용골대와 마부대에게는 각각 3천양 씩 주도록 하였다.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성을 둘러보고 동쪽 성 밑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장졸들을 위로 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摠戎使) 구굉을 불러 위로하고 아울러 장졸들을 격려 하였으며 또 승지를 시켜 성(城)을 지키는 여러 군사들을 두루 순찰하니 군사들 가운데는 간혹 우는 사람도 있었다. 동풍이 크게 일어나고, 헌릉(獻陵)에 화염과 연기가 사흘 동안이나 끊기지 아니하였다.


 


 

정월 14일 갑인(甲寅)


 

이날날씨가 매우 추워서 성위의 군사들 중 동사자(凍死者)가 있었다.


 


 

정월 15일 을묘(乙卯)


 

도원수 심기원의 군관(軍官) 지기룡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통대구의 알과 연어들을 진상하였다. 체부(體府; 체찰사가 있는 관청)

에서 아뢰되 지기룡과 김기량이 죽음을 무릅쓰고 들어와 응원병의 소식을 전하였으니 그 공로를 포상하고자 하여 따랐다.

남병사(南兵使) 서우신, 함경감사 민성휘가 군사를 합하여 미원(薇垣)에 진을 치니 군사가 2만3천이라 하였다. 또 평안도 별장(別將)이 8 백여 기마(騎馬)의 군졸을 이끌고 안협(安峽)에 이르렀으며 경상도 좌병사(慶尙道左兵使) 허 완이 군사를 이끌고 쌍령(雙嶺)에 이르렀으나 교전도 하기 전에 패하여 죽었다. 우병사(右兵使) 민 영이 오래도록 힘써 싸우다가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또 충청감사 정세규가 용인(龍仁) 검천(儉天)에서 진군하였으나 적에게 패하고 그 생사는 알지 못하였다.


 


 

정월 16일 병진(丙辰)


 

오랑캐가 초항(招降); 항복 하라는 말)이라는 두 글자를 크게 써가지고 온 성중에 돌려 보였다. 홍서봉, 윤희, 최명길을 오랑캐의 진영에

보냈더니 용골대가 이르되 “새로운 말이 없을 것 같으면 다시 올 필요가 없다.” 고 하였다. 최명길이 청대하여 이르되 “신이 이 신검에게 들으니 이 신검이 여량(汝亮)과 명수(命壽)의 뜻이라고 하며 전하기를 ‘이른바 새로운 말이라는 것은 첫 단계의 말이라 임금과 필부가 같지 않으니 진실로 국가의 보존을 도모 한다면 무엇이든 극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오며 또한 새로운 말이라고 일렀던 것은 ‘우리에게 먼저 발설(먼저 말하도록)토록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시기를 보아 먼저 발설 하여 강화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옳겠사오니 영의정을 불러 의논하시어 속히 결정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어찌 그렇게 급하게 결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최명길이 말하기를 “이러한 말들은 사책(史冊)에 쓰는 것이 부당합니다.”고 하니 임금이 “쓰지 말라.” 고 명령하였다. 호군(護軍) 민 형남 이 소를 올려 이르기를 “오늘의 사태가 매우 급박합니다. 밖으로는 응원 병의 승전 소식이 없으며 안으로는 믿을 만한 훌륭한 장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외로운 성안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 온 나라 백성들의 죽음을 구제할 겨를이 없고 2백년의 종묘사직을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당초 정의를 지키려는 가벼운 의논이 사나운 오랑캐의 노여움을 유발시켜 이러한 병화를 초래하였으니 지금 후회 한들 어찌 하겠습니까? 부모의 병환이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때 효자의 마음으로 어찌 헛된 옛 방법만을 고수 하면서 구급약을 쓰지 않겠습니까? 옛날 산의생(散宜生)의 무리가 미녀와 주옥 들을 뇌물로 주(紂; 은나라 말의 폭군)에게 바치고, 유리(유里)에 갇혔던 문왕(文王)을 탈출토록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한 달 넘은 포위가 백등(白登; 중국 산서성의 산명. 한 고조가 이곳에서 흉노 모돈에게 7일간을 포위당하였음)보다 더 급하고, 하늘에 닿은 적의 세력은 모돈(冒頓; 사십만 대군으로 한 고조를 백등에 포위한 흉노의 이름)보다 더 심하였으니 만약 진평(陳平; 한고조의 신하로 지략이 뛰어난 정치가)으로 하여금 다시 태어난다면 신비한 계략과 기묘한 대책이 어디엔들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에 있어서는 국체(國體)가 그리 중하지 아니하며 대신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한 가지의 의논이 끝없이 험준하고 대각(臺閣; 내각)이 갈라서서 움직이는 모습들로 기회를 잃어버리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병법에는 속임수도 필요하고 전략은 이기는 것이 귀중한 것이옵니다.

모든 계략은 반드시 대신들과 상의하고 확정하여 전하의 마음에 굳게 결정하시고, 동요하지 마소서 또 조정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자신들의 마음을 숨김없이 전달토록 하소서.” 하였다.


 


 

정월 17일 정사(丁巳)


 

오랑캐들이 성 밖에 와서 사신을 불렀다. 이에 홍서봉, 최명길, 윤 희 등이 적의 진영으로 가서 꿇어 앉아 오랑캐의 글을 받아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대청국의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조유(詔諭; 임금이 신하에게 타이르는 말)한다. 짐이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멸망시키고 너희 백성들을 해치려는 의도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이치에 옳고 그름을 밝히려는 것이다.

또한 천지의 이치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주고 나쁜 자에게 화를 주는 법이다. 그러한 천지의 이치를 짐이 체득하였으니 마음을 기울여 명령에 돌아오는 자는 우대하여 길러주고 위풍을 바라보고 항복하는 자는 안전하게 하여주는 반면,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토벌 할 것이며 나쁜 무리에 섞여 칼날을 잡는 자는 죽일 것이며 완악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은 자는 생포할 것이며, 고집불통으로 굽히지 않은 자는 알도록 경계하고 교활한 자는 말을 못 하도록 할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짐을 적으로 삼은 까닭에 짐이 군사를 일으켜 여기까지 왔으니 만약 너희 나라가 다 나의 통치 아래 들어온다면 안전하게 길러주고 어린 아이처럼 사랑하지 아니 하겠는가?

지금 너희들이 살고 싶으면 속히 성을 나와 명령에 따를 것이며 전쟁을 하고 싶어도 역시 속히 나와 한판 싸우면 하늘이 보고 어떠한 처분을 내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홍서봉이 어전에 들어와 회답할 글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되 “나가서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라”고 하였다.


 


 

정월 18일 무오(戊午)


 

대신들이 적에게 회답할 글을 임금에게 윤허(허락)를 청할 새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글을 지을 사람도 들어오라 하였다.

임금이 글을 본 뒤에 최명길을 어전으로 불러놓고 온당치 못한 곳을 교정토록 하였다. 이때 이경증이 들어와 아뢰되 “임금님을 받들고 외로운 성에 들어와 이와 같이 위급한 상태가 되었으니 오늘의 일(강화하는 것)에 그 누가 이론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국가의 막중한 거조(擧措: 행동거지)이오니 어찌 비밀로 하겠습니까? 청하옵건대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과 2품 이상 관원들 전부를 불러놓고 유시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사람의 마음이 성실한 것이 적기 때문에 마음과 말이 같지 않다. 그래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도 역시 그 때문이었으니 이것을 염려한다.”고 하니 김 류가 말하되 “설사 다른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 고 하였다. 임금이 그렇겠다고 하니 최명길이 마침내 회답할 국서를 가지고 비국(備局)에서 물러나와 자구(字句) 수정을 가하였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 통곡하면서 찢어버리고 어전에 나아가 말하기를 “명분을 정한 뒤에는 반드시 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우리들을 책망할 것이니 성을 나가는 거동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한번 성문을 나가면 북원(北轅; 북쪽으로 끌려간다는 말)의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전하를 위하는 계획이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진실로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두 분 전하께서 이 포위망을 벗어나게 되신다면, 신이 어찌 감히 망령된 소견을 전달하겠습니까? 국서를 찢어버린 것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원하옵건대 신의 머리를 먼저 벤 다음 깊은 생각을 다 하옵소서”하였다. 임금이 한동안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위로는 종묘사직을 위하고 아래로는 부형과 백관들을 위하여 할 수 없이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경의 말이 옳은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진작 죽지 않고 오늘 이 지경을 당한 것이다” 하였다. 세자가 곁에 있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니 울음소리가 밖 까지 들렸다. 회답할 국서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은 삼가 대 청국 관온 인성 황제(황제 밑에 ‘폐하’라는 두 글자가 있었던 것을 여러 신하들의 말에 따라 지워 버렸음}에게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밝은 칙지(勅旨; 칙서)를 받들어보니 내려주신 간절한 꾸지람은 지극한 가르침이라 추상같이 엄숙한 가운데에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바람처럼 온화한 뜻을 띄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국의 위덕(威德; 위엄과 덕망)이 먼 병방에까지 더하여져 하늘 뜻과 사람의 도리의 귀결이 합치되었으니 밝은 명(천명)이 막 새로워 졌습니다. 소방이 10년을 맺어온 형제의 나라로서 대국의 운세가 흥왕(興旺)하는 처음에 허물을 지었으니 마음에 반성하여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간절합니다. 지금의 소원은 다만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옛 관습을 씻어버리고 온 나라가 명령을 받들어서 이 변방을 보존하는 것뿐입니다. 위급한 정상을 살피시고,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하여 주시면, 문서와 예절에 있어서는 저절로 응대 시행할 의식이 있을 것이니 차차로 강구 실행하겠습니다. 오늘로 성을 나오라는 명령을, 어진 덕으로 포용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 됩니다. 그러나 중첩된 포위망이 풀리지 않았으며 황제의 노여움이 대단하오니 여기에 있어도 죽을 것이며 성을 나가도 역시 죽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폐하의 깃발을 바라보고 자결하는 것은 그 또한 슬픈 일이옵니다. 옛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를 배알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것은 지중한 예법을 폐할 수 없는 반면 군사의 위세 또한 두려웠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방의 간절한 소원은 이미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으니 이것이 할 말을 다한 것이며, 이것이 경계할 줄 알았던 것이며 이것이 마음을 기우려 명령 하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만물을 생성시키는 천지의 덕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소방이 어찌 온전하게 살려주고 너그럽게 길러 주는 데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하늘같은 황제의 덕으로 꼭 불쌍하게 여기시고, 관용을 베푸실 것이기에 감희 실정을 말씀드리고 삼가 은혜로운 칙지를 기다립니다.” 하였다.

사신들이 이 국서를 가지고 적의 진영에 갔더니 용골대가 마부대의 외출을 핑계 삼아 받지 아니하여 할 수 없이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폐하’라는 두 글자를 다시 첨가하였다.


 


 

정월 19일 기미(己未)


 

오랑캐들이 서문 밖에 이르러 우리 사신의 파견을 재촉하였으나 이때 좌의정 홍서봉은 병으로 사양하고, 우의정 이 홍주와 최명길, 윤 휘가 사신으로 적의 진영에 갔다. 적이 성안으로 대포를 발사하였다. 대포알의 크기가 오리 알만 하였으며 간혹 폭탄에 맞아서 죽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정온(鄭蘊)이 차자(箚子: 간단한 소)를 올려 이르기를 “신이 외부에서 떠드는 소문을 듣건대 어제 우리 사신들이 적진에 들어가 적에게 칭신(稱臣; 신이라고 하는 것) 진걸(陣乞; 애걸 한다는 것)하였다. 하오니 이러한 말이 진실이옵니까? 만약 진실이라면 이것은 반드시 최명길의 말일 것입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서 간담이 떨어지는 듯, 하였으며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앞뒤의 문서가 모두 최명길의 손에서 나와 그 말이 극히 야비하고 아첨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한 장의 항복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 명분만은 지켰습니다. 지금 만약 신하라고 일컬으면 임금과 신하의 분수가 결정되면 정차는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되옵니다. 만약 저들이 성을 나와 항복하라고 명령하면 장차 성을 나와 항복하시렵니까? 북쪽으로 가라고 명령하면 전하께서 북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옷을 바꾸어 입고 술을 돌리라고 명령하면 전하께서 술을 돌리겠습니까?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시면 저들이 반드시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가지고 죄를 줄 것이며 복종 하시면 국가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전하께서 어떻게 처리 하시겠습니까? 최명길의 뜻은 한번만 신하라고 말하면 성의 포위망도 풀릴 것이며 군부(君父: 임금)도 온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설사 그와 같이 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하찮은 소인들의 충성입니다. 하물며 그렇게 될 이치가 만무함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영구히 멸망하지 않는 나라가 이 천하에 있겠습니까? 무릎을 굻고, 망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정의를 지키면서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옳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부자군신(父子君臣)이 성을 등지고 한판 결전을 벌이면 성이 도리어 안전하게 될 이치가 없지도 아니함이겠습니까? 아! 우리나라의 중국에 대한 관계는 고려 말의 원나라에 대한 관계에 비하면 더욱 긴밀하였습니다. 부자의 은의를 잊어버리겠습니까?

군신의 의리를 배반하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는데도 최명길은 해를 두 개로 하려하고 백성에게는 두 사람의 임금이 없는데도 최명길은 두 임금을 섬기려고 하옵니다. 차마 이러한 일을 하였으니 무엇인들 차마 못 하겠습니까? 신은 몸이 병들고 힘이 약하여 비록 손바닥으로 치지는 못하오나 서로 같은자리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최명길의 말을 쾌히 물리쳐서 매국한 죄를 시키도록 명령하시와 망언한 자들로 하여금 나라에 보답 하지 못하는 짓을 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월 20일 경신(庚申)


 

오랑캐들이 또 와서 사신을 보내도록 재촉하였다. 이홍주 등을 사신으로 하여 전일의 국서를 가지고 적의 진영으로 가서 답서를 받아 돌아 왔다. 그 글에 이르기를 “네가 천명을 어기고 맹세를 배반 하였기에 짐이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하였으니 용서하지 않기로 뜻을 정하였다. 지금 네가 외로운 성을 곤란하게 지키면서 짐이 간절하게 꾸짖은 조서를 보고 죄를 뉘우칠 줄 알았으며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사면을 구하였다. 짐이 넓은 도량으로 스스로 심기일신토록 허락한 것은 공격할 힘이 모자라 취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포위할 세력이 부족하여 오도록 부른 것도 아니었다. 이 성을 공격하면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두더라도 추량(芻糧: 말 먹이와 사람의 식량)이 떨어져 자멸할 것이니 능히 취할 수 있다. 이 같은 좁고 작은 성 하나를 취하지 못한다면 장차 유연(幽然)을 어찌 취하겠는가? 너에게 명령하여 성을 나와 짐을 만나자고 한 것은 첫째로 네가 진심으로 나에게 열복하는가를 보고 둘째로는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다시 나라를 온전하게 하여 주어 온 천하에 신의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만약 계략으로 유인한다면 짐이 바야흐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어 사방을 평정하는 이때 너의 전과를 용서하며 남조(南朝: 명나라 조정을 지칭하여 하는 말)의 표본을 삼을 것이다. 만약 속임수로 너를 취하게 된다면 온 천하를 그러한 속임수로 능히 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온 천하가 짐에게로 돌아오는 길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이니 지우(智愚: 지혜롭고 어리석음)의 관계없이 다 같이 아는 바이다.

네가 만약 질질 끌며 결정치 않고 나오지 않는 다면 온 나라가 짓밟히고 추량(芻糧)이 다 되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재해가 날로 증가 할 것이니 실로 시각을 지연시킬 수 없는 것이다. 짐이 처음에는 너희 신하들 중에서 정묘 년 맹세를 제일 먼저 저버린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였으나 지금 네가 과연 성을 나와 나의 명령에 귀의 하려면 우선 제일 먼저 배반을 모의한 자 두 세 사람을 결박하여 보내면 짐이 효시(梟示; 죄인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보이는 것)하여 후인을 경계 하겠다. 짐의 서쪽 정벌의 큰 계획을 그르쳐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가 바로 이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만약 그자들을 미리 보내지 않더라도 네가 이미 귀항한 뒤에는 수색하여 찾아내는 그러한 것을 짐이 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만약 나오지 아니하면 비록 성심으로 빌고 청하더라도 짐이 듣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유시(諭示; 타일러 가르침)한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오늘 그들의 말이 어떠하였는가?” 하니 최명길이 말하되 “용골대와 마부대가 이르기를 처음에는 좋은 뜻이 없었다가 지금은 너희 나라에서 한결같이 사죄한 까닭에 황제가 전일의 노여움을 모두 풀었으니 지금 성을 나오려고 할 것 같으면 먼저 척화(斥和; 강화를 반대하는 것)를 주창한 자 두 사람을 보내라 그렇게 하면 내일에 성의 포위를 풀고 떠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을 나온 뒤에도 또다시 다툴 실마리가 있어진다”고 말한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척화한 신하들을 찾아 어찌 결박하여 보내겠는가?” 하니 김 류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명나라 조정을 섬긴지가 이미 오랜 까닭에 몇몇 사람들이 배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부터 대국을 섬기게 되면 뒷날 대국을 배반하지 않은 것이 역시 오늘날 명나라 조정을 배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최명길이 이르기를, “마땅히 강화할 조약을 정하여 그 회답을 보는 것이 좋겠다.” 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이 나가서 답서를 만들어 보라.”고 하였다.


 


 

정월 21일 신유(辛酉)


 

이흥주가 국서를 가지고 적의 진영에 갔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신(臣) 아무는 삼가 대 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신이 하늘에 죄를 얻어 외로운 성에서 곤궁하게 않았으니 지금부터 멸망하는 것이 조석에 박두(迫頭; 가까이 닥치어 옴)하였습니다.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스스로 심기일신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실제로는 감히 격노 하신 하늘을 기피할 수 없었다가 전일의 허물을 모두 풀어주신다는 은혜로운 칙서를 받들었습니다. 추상같은 엄한 위엄을 너그럽게 하시고 봄날의 따사로운 혜택을 펴 주시와 동쪽 나라 수 천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수화(水火)속을 벗어나도록 하여주셨으니 어찌 다만 한 개의 성안에서만 생명의 연장을 얻었을 뿐이겠습니까? 군신부자가 감격의 눈물로 보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일 성을 나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실로 의심스럽고 두려운 실마리가 많았습니다.

때마침 하늘의 노여움을 거두시지 않은 때이라 감히 소회(所懷;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를 다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제 진심을 보여주시고 정녕 깨달아 알게 하셨으니 참으로 옛사람이 이른바 진심으로 사람을 마음속으로 아껴주신 것입니다. 신이 대국을 섬김으로부터 십여 년 폐하의 신의에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오래입니다. 평소의 언행이 부합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물며 폐하의 명령이 사시(四時)와 같았음이겠습니까? 신이 다시는 이것으로써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한편 신에게 한 가지 민망스러운 사정이 있으니, 폐하께서 덕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동방은 본래 풍속이 급박하고 비루하며 예절이 섬세하고 까다로워 임금의 동정에 이상한 일이 있으면 놀란 눈초리로 보면서 이상하게 여깁니다.

만약 그 풍속을 따라서 다스리지 아니하면, 끝내 나라를 세워 나갈 수 없습니다. 정묘년 이후로 조정 신하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논은 많았으나 그것을 진정시키는 데에 가혹한 책망을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이것을 염려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성안에 가득한 백관과 사서인(士庶人)이 위급한 사세를 목도하고 폐하의 명령에 따라야 된다는 의논은 다 같이 말하면서도 유독 성을 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 고려조 이후로 없었던 일이라 하여 스스로 죽음을 본분으로 여기면서, 나가려고 하지 아니 합니다. 만약 대국에서 독촉을 계속 한다면 뒷날 얻어지는 것은 수많은 시체를 쌓을 뿐입니다. 지금 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이 이와 같으니 하물며 그 밖의 것이겠습니까? 예로부터 나라의 망하는 것이 오로지 적병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세운다고 하여도 오늘날의 인심으로 보아 기꺼이 임금으로 추대 하지 아니할 것이오니 이것을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려는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위세 있는 군사를 이끌고 천리의 변방 까지 들어 온지 두 달이 체 못 되어 그 나라를 신하로 귀항시키고 그 백성을 어루만져 주었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보기 드문 공적으로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반드시 신을 만나본 뒤에라야 이 성을 이겼다고 말한다는 것입니까?

폐하의 위엄에는 아무런 손상됨이 없으면서 소방의 존망이 이 한 가지에 달려있습니다. 하물며 대국이 이 성을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이기지 못할까 봐서가 아니었으며 또한 성을 공격하는 것은 죄를 토벌하기 위함이라 이제 이미 신이 감복 하였으니 이 성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뛰어난 출천의 지혜로 만물을 밝게 미치시나니 소방의 진정한 사정을 남김없이 통촉하여 주소서 척화를 주창한 여러 신하에 대한 일은 소방의 법도에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이라는 관직이 있어 쟁론(爭論; 국사에 대하여 서로 토론하고 잘잘못을 논하는 것)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날의 소위는 극희 허망한 잘못된 일이라 오늘날 소방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 모두 이 사람들의 허물인 까닭에 지난해 가을 그 근거 없는 허황한 말로 국사를 그르친 자들을 축출 하였습니다.

이제 황제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의 본심을 생각해 보면 다만 그 식견이 편협하고 혼미하여 천명의 소재를 모르고, 그릇되게 옛 것만을 지키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뿐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서 군신의 대의(大義)를 가지고 한 세대를 휩쓸고 있으니 이 같은 무리들도 마땅히 관용 속에 거두어 두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처럼 넓으신 폐하의 도량으로 이미 이 나라 임금의 죄를 사면하셨으니 이들 보잘 것 없는 소신(小臣)들을 소방의 법률에 회부토록 하여주시면 관대하신 덕이 더욱 더 돋보이겠습니다.

까닭에 어리석은 소견을 아울러 전달하고, 폐하의 너그러운 처분을 기다립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였다. 이홍주 등이 국서를 전하고 돌아온 뒤에 임금이 최명길을 불러 이르되 “전일의 국서에 용골대가 말한 두 조목의 일을 듣고 싶다.” 고 하니 최명길이 말하기를 “신이 먼저 척화인사들에 대하여 대답하였으며 성을 나가는 한 조목은 국서 안에 있는 뜻을 해석하여 말하였더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심양에 있으면 다만 문서만 보내더라도 되겠으나 지금은 이미 여기까지 나와 있으니 국왕이 성을 나오지 않을 수 없다’고 일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되 “저들이 반듯이 나를 유인하여 꼭 성을 나오도록 하려는 것은 필시 나를 붙잡아서 북쪽으로 돌아가려는 심산일 것이다.

경들이 대답을 우물우물 응낙하지 않았는가?” 하니, “준엄한 말로 거절하였다.”고 최명길이 대답하였다. 저녁 때 용골대가 국서를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나라의 답서가 황제의 글 뜻과 같지 않은 까닭에 받을 수 없다.” 고 하였다.


 


 

정월 22일 임술(壬戌)


 

조정에서 척화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수 하도록 하였다. 세자가 비국에 봉서(封書; 중대한 일을 쓰고 밀봉한 것)를 내려 이르되 “새알 위에 태산이 내려앉았으니 이 위급한 국사를 누가 반석 위에 올려놓겠는가? 일이 이미 급박하다. 나에게 두 사람의 아우가 있고 또 아들 하나가 있으니 종묘사직을 받들 것이니 내가 비록 적에게 죽은들 무엇이 슬프겠는가? 그러니 ‘내가 출성 한다’ 는 뜻을 전하라.” 고 하였다.


 


 

정월 23일 계해(癸亥)


 

세자가 조정에 명하여 속히 인마(人馬)를 정돈하여 청의 진영에 가도록 하라고 독촉하니 조정에서 회답하기를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라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수원(水原)에 있는 무장들이 정원(正院; 중앙 집부)문 밖에 모여 척화한 신하들을 내보내도록 청하였다. 밤중에 적의군사가 적어진 틈을 타서 서성수어사(西城守禦使) 이 시백이 역전 분투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물러갔다가 얼마 뒤에 다시 와서 동쪽 성을 습격 하였으나 역시 패하고 달아났다. 우의정 이하 대신이 국서를 가지고 적의 진영에 가니 용골대와 마부대 두 오랑캐가 ‘황제가 멀리 진중에 있다’는 핑계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그 글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신 아무는 삼가 대 청국 관온 인성 황제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은 나라 밖에 있는 약소한 나라입니다. 중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강하고 큰 나라에게 신하로서 복종하였으니 고려조에서 원나라에 대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하늘의 도움을 받아 큰 운세를 얻었습니다. 소방이 국경을 서로 접하여 섬긴 것이 이미 오래라 마땅히 맨 먼저 귀순하여 여러 나라의 선도자가 되어야 하였음에도 지금까지 지체된 것은 대대로 명나라 조정을 섬겨 정해진 명분으로 신하의 절의를 갑작스레 변경할 수 없었으니 이 역시 당연한 정례(情禮)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나 혼미한 탓으로 망령 된 일이 실로 다하였습니다. 작년 봄 이후로 대국에서 소방을 대함에 정의(情意)를 빠뜨리지 않았는데에도 소방이 대국에 대하여, 종종 허물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대군의 정벌을 당한 것은 실로 소방이 자취(自取)한 것이라 군신 상하가 다 같이 두려운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 뜻밖에 하늘처럼 어진 덕으로 불쌍하게 여겨 주시와 종묘사직의 보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본월 17일 황제의 칙지에 이르되 '만약 너희 나라가 다 나의 통치하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안전하게 길러주고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20일의 칙지에 이르되 “짐이 넓은 도량을 열어놓고 너희들 스스로 심기 일신할 것을 허용 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한 번 퍼짐에 만물이 모두 참으로 이른바 봄을 만난 듯 하였으니 참으로 생사골육(生死骨肉: 죽은 사람 을 살려주고 그 뼈에 살을 붙여주는 것. 즉 매우 깊고 큰 은혜라는 말)의 깊은 은혜였습니다. 동방의 사람마다 자자손손이 다 폐하의 은공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물며 신의 몸에는 재생의 은혜를 입었음이겠습니까? 지금 신(臣)이라고 말하며 표문을 받들고 변방이 되어 대대로 대국 조정을 섬기려고 원하는 것도 역시 그칠 수 없는 인정과 천리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신이 이미 폐하에게 몸을 맡겼으니, 마땅히 폐하의 명령을 지체 없이 받들어야 하는데도, 감희 성을 나가지 못하는 까닭은, 신의 사정이 실로 전일에 전달한 것과 같은 바가 있으니, 이 한 조항은 신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의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라준다.'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즉, 신의 하늘이라 어찌 아니 용납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한 폐하께서 이미 죄를 용서하고 신하로 허락하셨으며 신도 신하의 예법으로 폐하를 섬겼으니 성을 나가고 나가지 않은 것은 다만 예절일 뿐입니다. 어찌 그 큰 것은 허용하시고, 작은 것은 허용하지 않겠습니까? 까닭에 신의 소망으로는 대국의 군사가 회군하는 날을 기다려 은혜로운 칙서를 성 중에서 받들고 단을 모아 망배(望排)로써 폐하의 수레를 전송한 뒤에 대신을 사은사(謝恩使)로 보내 소방이 진심으로 열복하는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앞으로 대국을 섬기는 예절은 모두 상식에 따라 영원토록 끊지 않겠습니다. 신이 방금 성심과 신의로서 폐하를 섬기고 폐하는 역시 예의와 은혜로써 소방을 대하시어, 군신 간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백성들에게는 화가 풀리고 후세에 칭송이 있게 되면 오늘날 소방에서 격은 병란이 실제로는 자손들의 무궁한 경행(慶幸; )이 될 것입니다. 척화 제신들의 일은 전에 올린 글에 대략 진달 하였습니다. 대개 이 사람들이 감히 그릇되고 망령된 말을 하여, 양국의 큰 계획을 그르쳤으니 이것은 다만 폐하께서 미워하실 일이 아니라 실로 소방의 군신이 다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엄중한 처벌을 한 푼인들 어찌 아끼겠습니까? 다만 작년 초봄에 제일 먼저 제창한 대간 홍익한은 대국의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쫓아내어 그로 하여금 대군의 전봉에 당하도록 하였으니 만약 대군 앞에서 생포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본토로 회군하는 길에 어렵지 않게 포박될 것입니다. 그밖에 쫓겨나 외지에 있는 자도 역시 길이 트인 뒤에 같은 곳을 탐문하여 처벌 할 것입니다. 지금 신을 따라와 성안에 있는 자는 비록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사람이 있으나 그 죄가 저들에게 비교하여 매우 가볍습니다. 또한 폐하께서 소방의 사정을 살피시지 못하고 신이 숨겨 놓았을까 의심하오면 신이, 지성으로 향앙(向仰;)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자백할 곳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까닭에 이미 조정에 명령하여 자세하게 조사하고 심문토록 하였습니다.

조사와 심문이 끝나는 대로 진영으로 보내서 폐하의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하였으니 이 글은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정월 24일 갑자(甲子)


 

적이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峰) 아래에 대포를 쏘아 포탄이 행궁(行宮)에 떨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물러갔다.

적병이 남쪽성에 침범한 것을 우리군사가 격퇴시켰다. 적이 서쪽 문 밖에 이르러 사신의 파견을 독촉하니 이홍주 등이 적의 진영으로 가서 국서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정월 25일 을축(乙丑)


 

종일토록 포성이 그치지 않았으며 성벽이 탄환을 맞아 다 무너지니 군정(軍情)이 더욱 흉흉하였다. 용골대 마부대가 우리 사신의 면담을 청하여 이덕형, 최명길, 이성구 등이 가보니 그들이 말하기를 “황제가 내일 환국하게 된다. 임금이 만약 성에서 나오지 아니 하려면, 사신들도 절대로 나오지 말라.” 하고, 전후에 보낸 국서를 모두 되돌려주고 최명길은 대화도 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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